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186

뒷모습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뒷모습 / 이 효 ​ 앞집 훈이 아저씨가 은퇴를 하셨다 병원장님 댁 정원사로 일을 하셨다 빠른 손놀림을 눈여겨 본 병원장님은 아저씨를 병원 기관실로 보내셨다 첫 출근이었다 ​ 아저씨 인생이 별거 아니라는 사람들 그래도 새벽부터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아저씨는 병원 문턱이 닳도록 일을 하셨다 열등감 따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어린 아들을 세명이나 키워야 했다 한 평생 전투를 하듯이 살아온 인생도 국수발 잘리듯이 잘여나가는 시간이 왔다 은퇴를 하란다. 느린 손놀림은 헛헛한 웃음만 자아낸다. ​ 마지막 퇴근길에 아픈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 병원 앞 욕쟁이 할머니네서 만둣국을 포장했다. 할머니의 마지막 말씀은 뒤지지 말고 살란다 상 위에 오른 만두를 자른다 아직도 배가 통통해서 견딜만한데..

함박 웃음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 함박 웃음 / 이 효 ​ ​ 창문 넘어 함박 눈이 내린다 하늘이 환하게 웃는다 ​ 유리병에 붉은 수국이 피었다 식구들이 환하게 웃는다 ​ 당신도 누군가를 위해서 그렇게 환하게 웃어준 적 있는가 ​ 웃긴 세상에 실없이 웃는 날 정말 많았다 상인들도 실없이 웃고 행인들도 실없이 웃었다 ​ 유리병처럼 코로나로 갇힌 세상이지만 단 하루 만이라도 하늘을 바라보자 가슴에서 멍이 녹아내린다 ​ 눈물이 눈으로 벙글 거린다 땀이 수국으로 벙글 거린다 나도 내일을 향해 벙글 거린다 ​

해장국 끓이는 여자와 꽃

그림 : 김 정 수 ​ 해장국 끓이는 여자와 꽃 / 이 효 ​ 사람들이 잠든 새벽 해장국 끓이는 여자는 가슴에 꽃씨를 품는다 ​ 내일은 해장국집 간판 내리는 날 애꿎은 해장국만 휘휘 젓는다 ​ 옆집 가계도, 앞집 가계도 세상 사람들이 문 앞에 세워놓은 눈사람처럼 쓰러진다 희망이 다 사라진 걸까 ​ 화병 안에 환하게 웃고 있는 꽃송이 하나 뽑아 가계 앞 눈사람 가슴에 달아준다 ​ 무너지지 마 오늘 하루만 더 버텨보자 폭풍 속에 나는 새도 있잖아 ​ 가마솥에 꽃이 익는다 여자는 마지막 희망을 뚝배기에 담는다 눈물 한 방울 고명으로 떠있다 ​

부엌 앞에 선 바람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부엌 앞에 선 바람 / 이 효 낡은 부엌문 바람이 두들기는데 그대 문 열어준 적 있는가 차가운 빈 그릇에 바람 소리 말을 더듬고 누군가는 마음에 붉은 사랑 담아내는데 내 마음은 닫혀있는 고양이 눈 찬 부뚜막에 엎드려 기도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부엌에 온기를 넣는 것 둥근 밥상에 수저 두 개 올려놓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굽는 일 차가운 바람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살며시 부엌 문을 열어주는 것 부뚜막 위로 햇살이 엎질러지고 바람은 잠시 단추를 채우고 돌아나간다 그림자처럼 춥고 외로운 사람들 쓰러진 술병처럼 몸이 얼었다 녹는다 산산이 발려진 생선 가시들의 잔해들 무표정한 가시들을 모아 땅에 묻는다 상처 난 것들 위로 첫눈이 하얗게 내린다 바람이 붉다

호박에 관하여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호박에 관하여 / 이 효 ​ 벽 같은 영감탱이라고 밤낮 소리 질렀는데 그래도 못난 마누라 배 나왔다고 등 받쳐주는 건 당신뿐이구려 ​ 내 손바닥 거칠다고 손 한 번 잡아주지 않더니 간밤에 슬며시 까칠한 잎 담장 위에 올려놓은 건 당신뿐이구려 ​ 이웃집 늙은 호박 누렇게 익어 장터에 팔려 나갔는데 시퍼렇게 익다만 내게 속이 조금 덜 차면 어떠냐고 한 번 맺은 인연 끈지 말자며 투박한 말 건넨 건 당신뿐이구려 ​ 둥근 호박 메달은 긴 목 바람에 끊어져 나갈까 봐 몸에 돌을 쌓고 흙을 발라서 바람 막아주는 건 당신뿐이구려 ​ 영감, 조금만 참아주시오 내 몸뚱이 누렇게 익으면 목줄 끊어져도 좋소 당신을 위해서라면 호박죽이 될망정 뜨거운 가마솥에 들어가리라 ​ 늙어서 다시 한번 펄펄 끓고 ..

마음의 꽃병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마음의 꽃병 / 이 효 ​ 한 해가 다 저물기 전에 담밖에 서 있는 너에게 담안에 서 있는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 보인다 ​ 높은 담만큼이나 멀어졌던 친구여 가슴에 칼날 같은 말들이랑 바람처럼 날려버리자 ​ 나무 가지만큼이나 말라버린 가슴이여 서먹했던 마음일랑 눈송이처럼 녹여버리자 ​ 오늘 흰 눈이 내린다 하늘이 한 번 더 내게 기회를 준 것 같구나 하얀 눈 위에 글씨를 쓴다 ​ 내 마음의 꽃병이 되어다오. ​

구부러진 골목길 / 이 효

​ 구부러진 골목길 / 이 효 ​ 허름한 대문 앞 붉은 화분을 보면 꽃 속에서 주인의 얼굴이 보인다 ​ 지붕 위로 엉켜진 전깃줄을 보면 어머니의 구수한 잔소리가 들린다 ​ 골목길 자전거 바퀴를 보면 동네 아낙네들 굴러가는 수다 소리가 들린다 ​ 배가 불뚝한 붉은 항아리를 보면 할아버지 큰 바가지로 막걸리 잡수시던 술배가 생각난다 ​ 구부러진 골목 안에는 이름만 부르면 뛰어나올 것 같은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 멀리서 보이는 고층 아파트가 군화를 신고 달려온다. 새들이 날아가 버린 나무에 붉은 감이 울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