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가을 13

부리와 뿌리 / 김 명 철

그림 / 서 순 태 ​ ​ ​ ​ ​ ​ 부리와 뿌리 / 김 명 철 ​ ​ ​ 바람이 가을을 끌고와 새가 날면 안으로 울리던 나무의 소리는 밖을 향한다 나무의 날개가 돋아날 자리에 푸른 밤이 온다 ​ ​ 새의 입김과 나무의 입김이 서로 섞일 때 무거운 구름이 비를 뿌리고 푸른 밤의 눈빛으로 나무는 날개를 단다 ​ ​ 새가 나무의 날개를 스칠 때 새의 뿌리가 내릴 자리에서 휘바람 소리가 난다 나무가 바람을 타고 싶듯이 새는 뿌리를 타고 싶다 ​ ​ 밤을 새워 새는 나무의 날개에 뿌리를 내리며 하늘로 깊이 떨어진다 ​ ​ ​ ​ 김명철 시집 / 짧게, 카운터펀치 ​ ​ ​ ​

들국화 / 천 상 병

그림 / 김 정 수 ​ ​ ​ ​ 들국화 / 천 상 병 ​ ​ ​ 산등선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 가을은 다시 올 테지. ​ 다시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 ​ ​ ​ *1930년 일본에서 출생 *1945년 김춘수 시인 주선으로 문예지에 추천됨 *1954년 서울대 상과대 수료 *1971년 유고시집 발간 *시집 *1993년 4월 28일 별세. ​ ​ ​ ​ ​

도봉산 (포대능선 오르는 길)

도봉산은 멋진 바위가 유난히 많다. ​ 망월사역에서 내린다. ​ 대원사를 지난다. ​ 담장에 가을이 올라앉았다. ​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한다. ​ 길 위에 낙엽이 많이 떨어졌다. ​ 나뭇잎 위에 여름과 가을의 흔적이 수놓아졌다. ​ 불안해 보이는 바위지만 참 오랜 세월 잘 버텨준다. ​ 소리 없이 물드는 가을이 너무 아름답다. ​ 단풍잎이 곱게 옷을 갈아입는다. ​ 나도 저렇게 곱게 물들고 싶다. ​ 바위가 떨어질까 봐 철심을 박아놓았다. ​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간다. ​ 멀리 보이는 도시들이 멋지다. ​ 바위와 곱게 물든 나무들이 잘 어울린다. ​ 철끈을 잡고 바위를 타고 올라간다. ​ 바위에 철심을 박아서 참 아프겠다. ​ 경사가 만만하지 않지만 조심히 올라간다. ​ 멀리 ..

가을 편지 / 나호열

그림 / 노 숙 경 ​ ​ ​ 가을 편지 / 나호열 ​ 당신의 뜨락에 이름모를 풀꽃 찾아왔는지요 눈길 이슥한 먼 발치에서 촛불 떨어지듯 그렇게 당신을 바라보는 꽃 ​ 어느 날 당신이 뜨락에 내려오시면 이미 가을은 깊어 당신은 편지를 읽으시겠는지요 ​ 머무를 수 없는 바람이 보낸 당신을 맴도는 소리죽인 발자국과 까만 눈동자 같은 씨앗들이 눈물로 가만가만 환해지겠는지요 ​ 뭐라고 하던가요 작은 씨앗들은 그냥 당신의 가슴에 묻어 두세요 상처는 웃는다 라고 기억해 주세요 ​ 당신의 뜨락에 또 얼마마한 적막이 가득한지요 ​ ​ ​ 나호열 시인 * 1953년 충남 서천 출생 * 경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 1991년 《시와시학》 중견시인상 수상 * 2004년 녹색 ..

풋고추에 막걸리 한잔하며 / 홍 해 리

풋고추에 막걸리 한잔하며 / 홍 해 리 처음 열린 꽃다지 풋고추 몇 개 날된장에 꾹꾹 찍어 막걸리를 마시네 나도 한때는 연하고 달달했지 어쩌다 독 오른 고추처럼 살았는지 죽을 줄 모르고 내달렸는지 삶이란 살다 보면 살아지는 대로 사라지는 것인가 솔개도 하늘을 날며 작은 그늘을 남기는데 막걸리 한잔할 사람이 없네 아파도 아프다 않고 참아내던 독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가 보잘것없는 꽃이 피고 아무도 모르는 새 열매를 맺어 접시에 자리잡은 고추를 보며 검붉게 읽어 빨갛게 성숙한 가을을 그리네 홍해리 시인 / 약력 ​ * 충북 청주에서 출생(1942년)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1964년) 1969년 시집 를 내어 등단함. ​ ​ ​ 시집

해바라기의 오해 / 마 경 덕

그림 : 박 영 숙 ​ ​ 해바라기의 오해 / 마 경 덕 ​ ​ 가을이 해체되었다 이 죽음은 합법적이다 내장이 드러난 콩밭과 목이 잘린 수수밭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 곁에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밭 ​ 꽃이어서, 해바라기는 다행이었다 ​ ​ 그림 : 박 영 숙 ​ ​ 이 작은 오해가 해바라기를 무럭무럭 키웠다 폭염을 삼킨 머리는 칼을 쓴 듯 무거워도, 함께 사진을 찍으며 사람보다 더 해맑게 웃었다 사방을 물들인 노랑노랑노랑 ​ 노랑은 유쾌하고 명랑한 색 ​ ​ 그림 : 박 영 숙 ​ ​ 까맣게 영근 늦가을 볕이 누런 해바라기 밭을 들락거리고 기름을 줄줄 흘리는 해바라기들 ​ ​ 그림 : 박 영 숙 ​ ​ 고개 너머 주인이 목을 칠 날짜를 받아놓고 숫돌에 낯을 가는 동안에도 발목에 차꼬를 매달고 익어가는 죄..

나무 한 그루 / 이 효 (자작 시)

그림 : 최 선 옥 ​ ​ 나무 한 그루 / 이 효 ​ 팔순 노모 새 다리 닮은 다리로 절뚝거리며 걷는다 저 다리로 어찌 자식들 업고 찬 강물을 건넜을까 ​ 찬바람 부는 날 아버지 닮은 나무 옆에 앉는다 영감 나도 이제 당신 곁으로 가야겠소 나무는 대답이 없다 ​ 텅 빈 공원에 쪼그만 새를 닮은 어머니 훌쩍 어디론가 날아갈까 봐 내 가슴에 푸른 나무 한 그루 부지런히 눈물로 키운다. ​ 눈에는 붉은 산이 들어앉아있다. ​ ​

경춘선 숲길, 혼자 뜨겁게

오래된 철로 위 낙엽이 눕는다. 나뭇잎들은 떠나고 싶어 한다. 찬비는 낙엽 소리를 잠재운다. 자전거길 홀로 마음을 다독여본다. 떠나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말이 없다. 구름으로 작별 인사를 쓴다. 손 흔드는 갈대도 속울음 참는다. 눈부시게 왔다가, 잔잔하게 떠나는 가을 기차가 떠날 시간을 정적 소리로 알려준다. 시끄러웠던 여름도, 가을도 빈 의자로 남는다. 눈물은 떨어져 붉은 열매로 앉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등불도 마음을 끈다. 헤어진다는 것은 곧 그리움이다. 시간이 죽기까지 돌면 별이 되어 오겠지. 눈물 괸 눈짓으로, 혼자 뜨겁게 사랑했다 말한다. 오, 가을이여~ 안녕

가을꽃다발 / 일리야 레핀 (러시아 화가)

​ 마지막 꽃들이 더 소중하네 / 알렉산드르 푸쉬킨(시인) ​ 마지막 꽃들이 더 소중하네 들판에 화려한 첫 꽃들보다 우리 가슴에 우울한 생각들을 더 생생하게 일깨우는 마지막 꽃들 그렇게 간혹 이별의 순간은 더 생생하네, 달콤한 만남의 순간보다도. ​ .......................................................... ​ 조금씩 수그러드는 가을빛을 뒤로하고 저녁 어둠이 찾아온다. 가을은 그 화려함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그리 길게 주지 않는다. 여름과는 달리 빨리 어둠의 품에 안겨 버리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들판을 헤매던 여인은 계절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꽃들을 꺾어 함께한다. 이미 자연과 하나인 양 그녀의 모자, 투피스, 그리고 꽃다발이 하나의 색깔로 어우러진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