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당신의숨한번 13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 이효

작품 / 한치우​ ​ ​ ​ ​ ​​ ​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 이효 ​ ​ ​ 입맞춤을 연습해 본 적이 없어 광신도가 춤을 추던 그날 밤 생명이 자궁에 바늘처럼 꽂혔지 아빠라는 단어를 사막에 버린 남자 무표정한 가을이 오고, 혈액형을 쪼아대는 새들 끊어진 전선으로 반복된 하루 딱 한 번의 입맞춤 눈빛이 큰 불을 지핀 거야 모든 삶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 매일 밤, 암막 커튼을 치고 바다로 가는 꿈을 꿔 나쁜 생각들이 골수를 빼먹어 아비도 없는 애를 왜 낳으려고 하니? 이름도 모르는 신에게 아가 울음을 택배로 보낼 수 없잖아 나는 썩지 않는 그림자니까 어느 날, 종소리가 달팽이관을 뚫고 아기 숨소리 깃털이 된다 생명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거래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세상에 두 번째 입맞춤을 알릴 ..

사진관 앞, 텅 빈 액자 / 이 효

그림 / 윤영선 ​ ​ ​ ​ ​ 사진관 앞, 텅 빈 액자 / 이 효​ ​ ​ ​ ​ 사진관에 붉은 벽돌은 네모난 관절 소리를 낸다 액자 속 나비넥타이와 검정 구두 신은 사내아이 어디로 간 것일까 ​ 어릴 적 사진 속 소년 그녀의 볼에 복숭아꽃 핀다 세월이 바람처럼 흘러가고 그 많던 사진 속 가족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사라진 시계 속 여자의 초침은 유년의 퍼즐을 하나 둘 맞춘다 ​ 텅 빈 액자 속 걸어 나간 사람들 골목길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 ​ ​ ​ ​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 ​ ​ ​ ​ ​ ​ ​

수국 편지 / 이 효

그림 / 이 효 ​ ​ ​ ​ 수국 편지 / 이 효​ ​ ​ 마당 한편 아침을 베어 물고 아버지 유서처럼 정원에 한가득 핀 수국 ​ 직립의 슬픔과 마주한 자식들 엄니 업고 절벽의 빗소리 젖은 꽃잎 떨어지는 소리마다 짙어지는 어둠의 경계 ​ 혀바닥 마르고 주머니 속 무게 마른 나뭇잎 같아도 샘물 퍼주며 살아라 ​ 바람에 날리는 수국 편지 맑다 ​ ​ ​ ​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 ​ ​ ​ ​

한울*강 / 이 효

그림 / 조 규 석 한울*강 / 이 효 그대가 그리운 날에는 바람 부는 강가에 서서 아득히 먼 산을 바라봅니다 오랜 세월 내 안에 가둬두었던 당신을 떠나보냅니다 그대가 생각나는 날에는 강가에 핀 유채꽃 사이로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봅니다 나뭇잎이 빗물에 씻기듯 마음에서 그대를 떠나보냅니다 인생은 강 건너 보이는 흐린 산 같은 것 푸른 것들이 점점 사라지는 눈물 그대는 먼 산으로 나는 강물로 왔다가 깊이 끌어안고 가는 묵언의 포옹 *한울 / 큰 울타리처럼 사람들을 포근하게 안아주어라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맨발 기차 / 이 효

그림 / 민병각 맨발 기차 / 이 효 동네에 휘어진 기차가 있다 빗물로 녹슨 선로 위에서 아이들은 외발 놀이 가위, 바위, 보 표정 없는 마네킹처럼 넘어가는 해 종착역의 꺼진 불빛은 눈알 빠진 인형 정거장이 사라진 태엽 풀린 기차 멈춰버린 음악, 깨진 유리창 구겨진 몸통은 달리고 싶은데 바퀴는 목발을 짚고 절뚝거린다 해는 떨어졌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맨발로 버티는 기차는 바람이 불어도 떠나는 아이들 목소리 잡지 못한다 철커덩, 청춘이 떠난 차가운 선로 위 여분의 숨결이 쌕쌕거린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항아리 / 이 효

그림 / 김정수 항아리 / 이 효 손길 닿지 않는 대들보에 항아리를 거신 아버지 까막눈 파지 줍는 아저씨 은행에 돈 맡길 줄 몰라 아버지께 당신을 건넨다 아버지 세상 떠나기 전 항아리 속에 꼬깃꼬깃한 돈 아저씨에게 쥐어준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 긴 겨울이 꼬리 잘리고 다시 찾아온 가을 검정 비닐 들고 온 아저씨 홀로 계신 어머니께 두 손 내민다 비닐 속에는 붉게 터져버린 감이 벌겋게 들어앉아 울고 있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달걀부침과 미스코리아 / 이 효

그림 / 이기호 달걀부침과 미스코리아 / 이 효 어린 딸내미 밥 수저 위에 올려주던 노란 달걀부침 볼은 주먹만 한 풍선 꼭꼭 씹어라 하나 둘 셋··· 서른 꿀꺽 아이고 우리 딸 미스코리아 되겠네 어른이 되어서 노란 꽃밭이 되라는 아버지 말씀 프라이팬 위에서 자글거린다 나는 왜, 아직도 미스코리아가 되지 못했나 볼에 노른자 주룩 흐른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