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당신의숨한번 18

묵과 어머니 / 이효

묵과 어머니 / 이효간병인이 사라진 날 척추가 불안한 어머니 집 딸만 보면 묵을 쑨다 수직 궤도 벗어난 꼬부라진 허리 싱크대에 매달려 추가 된다 끈끈한 묵 나무 주걱으로 세월만큼 휘젓는다 불 줄여라 엄마의 잔소리는 마른 젖 오래 저어라 끈기 있게 살라는 말씀 쫀득하다 어머니 묵 그릇 같은 유언 눈동자에 싸서 집으로 가져온다 풀어보니 검게 탄 일생이 누워 있다 입안에서 엄마 생각이 물컹거린다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날개 없는 앵무새 / 이효

날개 없는 앵무새 / 이효 아침마다 지하철을 타는 남자파스만 한 카드를 댄다 앵무새가 낡은 가방을 마중 나온다 행복하세요 띡낡은 등산복이 지나간다행복하세요 띡 김밥 한 줄 든, 검정 비닐봉지 간다행복하세요 띡 허공에 무수하게 뿌려진 마른 말들 도시는 절망을 버릴 시간도 없다 행복은 허공에 썰물로 빠져나가는데날개도 없는 앵무새여! 잠잠하라 지하철 게이트를 지나는 순간 수천 마리의 심장 없는 앵무새 목소리 행복하세요 띡행복하세요 띡 띡행복하세요 띡 띡 띡 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카테고리 없음 2024.12.25

숟가락을 놓다 / 이 효

그림 / 정도나숟가락을 놓다 / 이 효​낡은 부엌문 바람이 두들기는데빈 그릇에 바람 소리 말을 더듬고장작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둥근 밥상에 수저 두 개 올려놓고비린내 나는 생선을 굽는다할머니 나물 팔던 손으로부엌문 활짝 열어 놓았다​바람은 잠시 단추를 채우고 나간다그림자 된 춥고 외로운 사람들쓰러진 술병처럼 몸이 얼었다 녹는다산산이 발려진 생선 가시의 잔해들​무표정한 가시를 모아 땅에 묻는다상처 난 것들 위로 첫눈이 내린다​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부엌에 온기를 넣는 것​​​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

[박미섬의 홀리는 시집 읽기] 이효 시집 ‘장미는 고양이다’

오월의 발톱'을 세우고 비광飛光의 춤을!​  ​이효 시인​ ​시인은 고통에서 치유를, 슬픔에서 기쁨을 끌어내는 존재다. 시를 사랑하는 존재이면서 시를 통해 사랑을 전하는 존재다. ​제2시집 ‘장미는 고양이다’에서 이효 시인은 황폐한 현대성을 넘어서는 위험한 사랑을 감각적이고 독창적인 언어로 전해준다. 이는 ‘시인의 말’에 응축되어 있다.​ ​눈동자에 빛이 들어온다​ ​새벽을 통과한 나뭇가지들​ ​잎맥은 속도를 기억한다​ ​태양이 나뭇잎 위로 미끄러지면​은빛으로 변한 들고양이들​ ​飛光의 춤을 춘다​(‘시인의 말’)​ ​‘시인의 말’은 시집의 서문 격인 시. “태양이 나뭇잎 위로 미끄러지면” 들고양이들은 ‘비광’, 날아오르는 빛의 춤을 춘다.​은빛으로 변한 들고양이들의 자태가 사뭇 날렵하다.​ ​태양에서 ..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 이효

작품 / 한치우​ ​ ​ ​ ​ ​​ ​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 이효 ​ ​ ​ 입맞춤을 연습해 본 적이 없어 광신도가 춤을 추던 그날 밤 생명이 자궁에 바늘처럼 꽂혔지 아빠라는 단어를 사막에 버린 남자 무표정한 가을이 오고, 혈액형을 쪼아대는 새들 끊어진 전선으로 반복된 하루 딱 한 번의 입맞춤 눈빛이 큰 불을 지핀 거야 모든 삶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 매일 밤, 암막 커튼을 치고 바다로 가는 꿈을 꿔 나쁜 생각들이 골수를 빼먹어 아비도 없는 애를 왜 낳으려고 하니? 이름도 모르는 신에게 아가 울음을 택배로 보낼 수 없잖아 나는 썩지 않는 그림자니까 어느 날, 종소리가 달팽이관을 뚫고 아기 숨소리 깃털이 된다 생명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거래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세상에 두 번째 입맞춤을 알릴 ..

사진관 앞, 텅 빈 액자 / 이 효

그림 / 윤영선 ​ ​ ​ ​ ​ 사진관 앞, 텅 빈 액자 / 이 효​ ​ ​ ​ ​ 사진관에 붉은 벽돌은 네모난 관절 소리를 낸다 액자 속 나비넥타이와 검정 구두 신은 사내아이 어디로 간 것일까 ​ 어릴 적 사진 속 소년 그녀의 볼에 복숭아꽃 핀다 세월이 바람처럼 흘러가고 그 많던 사진 속 가족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사라진 시계 속 여자의 초침은 유년의 퍼즐을 하나 둘 맞춘다 ​ 텅 빈 액자 속 걸어 나간 사람들 골목길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 ​ ​ ​ ​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 ​ ​ ​ ​ ​ ​ ​

수국 편지 / 이 효

그림 / 이 효 ​ ​ ​ ​ 수국 편지 / 이 효​ ​ ​ 마당 한편 아침을 베어 물고 아버지 유서처럼 정원에 한가득 핀 수국 ​ 직립의 슬픔과 마주한 자식들 엄니 업고 절벽의 빗소리 젖은 꽃잎 떨어지는 소리마다 짙어지는 어둠의 경계 ​ 혀바닥 마르고 주머니 속 무게 마른 나뭇잎 같아도 샘물 퍼주며 살아라 ​ 바람에 날리는 수국 편지 맑다 ​ ​ ​ ​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