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당신의숨한번 10

검정 고무신 / 이 효

그림 / 허경애 검정 고무신 / 이 효 내 친구 옥이가 동창회에 나왔다 검정 고무신 신고 나왔다 질긴 고무신을 닮은 친구 유방암을 이겼다 흰 물감을 꺼냈다 옥아! 나이키 상표 하나 그려줄까 친구가 씩 웃는다 어, 조선 나이키 고무신 신고 친구랑 보름달 속을 걷는다 광화문에 함박꽃 두 그루 피었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한울*강 / 이 효

그림 / 조 규 석 한울*강 / 이 효 그대가 그리운 날에는 바람 부는 강가에 서서 아득히 먼 산을 바라봅니다 오랜 세월 내 안에 가둬두었던 당신을 떠나보냅니다 그대가 생각나는 날에는 강가에 핀 유채꽃 사이로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봅니다 나뭇잎이 빗물에 씻기듯 마음에서 그대를 떠나보냅니다 인생은 강 건너 보이는 흐린 산 같은 것 푸른 것들이 점점 사라지는 눈물 그대는 먼 산으로 나는 강물로 왔다가 깊이 끌어안고 가는 묵언의 포옹 *한울 / 큰 울타리처럼 사람들을 포근하게 안아주어라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맨발 기차 / 이 효

그림 / 민병각 맨발 기차 / 이 효 동네에 휘어진 기차가 있다 빗물로 녹슨 선로 위에서 아이들은 외발 놀이 가위, 바위, 보 표정 없는 마네킹처럼 넘어가는 해 종착역의 꺼진 불빛은 눈알 빠진 인형 정거장이 사라진 태엽 풀린 기차 멈춰버린 음악, 깨진 유리창 구겨진 몸통은 달리고 싶은데 바퀴는 목발을 짚고 절뚝거린다 해는 떨어졌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맨발로 버티는 기차는 바람이 불어도 떠나는 아이들 목소리 잡지 못한다 철커덩, 청춘이 떠난 차가운 선로 위 여분의 숨결이 쌕쌕거린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항아리 / 이 효

그림 / 김정수 항아리 / 이 효 손길 닿지 않는 대들보에 항아리를 거신 아버지 까막눈 파지 줍는 아저씨 은행에 돈 맡길 줄 몰라 아버지께 당신을 건넨다 아버지 세상 떠나기 전 항아리 속에 꼬깃꼬깃한 돈 아저씨에게 쥐어준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 긴 겨울이 꼬리 잘리고 다시 찾아온 가을 검정 비닐 들고 온 아저씨 홀로 계신 어머니께 두 손 내민다 비닐 속에는 붉게 터져버린 감이 벌겋게 들어앉아 울고 있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드라이플라워 / 이 효

그림 / 김형기 드라이플라워 / 이 효 내가 붉은 것은 당신을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가시가 있는 것은 나를 건들지 말라는 까닭입니다 언젠가는 타오르던 그 사랑도 시들겠지만 당신이 떠나면 슬픔 속 나는 마른 가시가 됩니다 사랑이 떠나도 견디게 하는 것은 향기가 남아서겠지요 오늘, 슬픔을 곱게 말립니다 오! 장미여

달걀부침과 미스코리아 / 이 효

그림 / 이기호 달걀부침과 미스코리아 / 이 효 어린 딸내미 밥 수저 위에 올려주던 노란 달걀부침 볼은 주먹만 한 풍선 꼭꼭 씹어라 하나 둘 셋··· 서른 꿀꺽 아이고 우리 딸 미스코리아 되겠네 어른이 되어서 노란 꽃밭이 되라는 아버지 말씀 프라이팬 위에서 자글거린다 나는 왜, 아직도 미스코리아가 되지 못했나 볼에 노른자 주룩 흐른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바늘귀 / 이 효

그림 / 문미란 바늘귀 / 이 효 이불 꿰매는 엄마 바늘귀에 실은 혀끝을 더듬는다 엿가락 뽑듯 길게 당긴 늘어진 오후 요년, 시집 멀리 갈래 엄마, 실을 길게 꿰면 새들이 수평선 넘어가 싫어, 소라와 게처럼 살래 대답은 빨랫줄에서 웃는다 햇살이 싹둑 잘린 오후 줄에 풀 먹인 유년이 펄럭인다 짧은 눈썹 같은 대답이 유순해진다 그녀는 구름 위에 신방을 꾸민다 그날 이후 딸년의 낭창거리는 목소리 들리지 않는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문학이야기/명시 2022.12.11 (17)

나침반 / 이효

그림 / 송민자 나침반 / 이효 푸르릉거리는 나비 한 마리 아버지 배낭 안에서 찾는 길 더덕이랑, 쑥이랑, 곰취랑 산등성에 봄내음 캔다 아버지 실웃음 링거에 걸고 하얀 꽃잎 위에 누운 날 이 빠진 풍금 소리 딸내미 가슴 음표 없는 울음 아버지의 배낭 속 지구만 한 나침반 숲에서 길을 잃은 발자국 소리가 절벽에 매달릴 때 초침 같은 남자의 미소 아버지 얼굴에 앉은 나비 나침반 위에 옮겨 앉으면 그 자리에 숲길이 환하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