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217

맨발의 시월 / 이효

맨발의 시월 이 효자유분방한 동거는 끝난 것인가초록으로 엉겨 붙었던 뜨거운 알몸은 가고가을은 시간이 벗어놓은 꽃신으로 온다언약은 여자의 눈동자 속에서 시들고주소를 잃어버린 쓸쓸한 나뭇잎들가을비는 발가락 사이, 단조로 스며들고나무에 매달린 열차표 한 장 푸르륵 떤다붉은 치맛자락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바람을 잡는 것은 사랑이다 아니다나뭇가지의 사라진 춤사위가 너다뚝, 뚝 바닥에 뒹구는 상념들맨발의 시월, 나는 숲에서 사랑을 잃고가을밤을 해금 소리로 노랗게 물들인다다시는 숲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한여름을 보낸 가을도 나처럼 벌겋게 운다2020년『신문예』2025년『미네르바』신인상인사동시인협회 부회장, 국제PEN한국본부 회원한국문인협회 회원, 노..

들국화는 별 속으로 / 이효

그림 / 한은숙 ​​ 들국화는 별 속으로 / 이효 ​산등선에 송곳 바람 맞고 우뚝 선 들국화야 벗들은 담장 아래서 물드는데 넌 동물 울음소리 삼키며 먼 산 지키고 있구나 ​밤하늘 수천 개의 별들과 나눈 사랑이 잣나무 사이로 빗겨온 세월을 삼키면서까지 자리를 지킬 만하더냐 ​능선 위에 들국화야 오늘 밤 떨지 말아라 세상은 홀로 가는 길이 아니다 캐시미르의 목동이 깎은 양털 이불로 덮고 가을 산에 함께 누워보자꾸나 ​들국화는 별이 되고 별은 들국화로 빨려 들어간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엘리베이터 / 이효

그림 / Andrea Stockel 엘리베이터 / 이효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노랫가락은 등뼈의 곡선을 타고 구부러진 논두렁 길, 허기진 시계 뜨거운 쇠 밥통, 광주리 속 노곤함 한 손에는 찌그러진 과부 닮은 주전자 오리 길, 솔밭까지 따라오는 끌탕* 신발짝은 늘어진 혓바닥 논두렁에서 올라온 산 같은 남자 종아리에 끈질기게 달라붙은 거머리 무심하게 떼어낸 아픔 붉은 핏빛이 선명히 저무는 태양 와 이리 늦었노, 배때기 창자에 붙었데이 쩌렁한 남자 목소리 어느 순간 끊어진 전기 총각 선생님 노래는 코드 빠진 전선 해당화는 그렇게 간다 뚝, 떨어지는 엘리베이터 *끌탕:속을 태우는 걱정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PS 할아버지는 부농이셨다. 그러나 엄마는 언제나 할아버지의..

벨 에포크*

벨 에포크* -미셸 들라크루아전 / 이 효​​​네모난 세상에 눈이 내린다전쟁은 하늘에 회색 눈썹을 단다총 든 사람은 세상을 맹수로 그리지만미셸은 붓으로 평화를 그린다 당신의 인생 중 가장 아름다운 시절언제였나화가는 강아지로 행복을 싸인한다유년의 크리스마스는 초록 스카프를 매고 춤을 춘다 파리의 백 년 전 모습은명암으로 외투를 벗는다풍차는 돌며 세상 그림자를 지우고마차 밖 키스는 양산을 쓴다 노을을 들추면 늙은 화가의 그믐달이 나온다녹아내리는 시간 앞에서 붓을 잡는다 누가, 마지막 정거장에 봄을 켜주실래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프랑스어​​​​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더벅머리 여름 / 이효

그림 / 백용준​​​더벅머리 여름 / 이효 ​ 물속에서 소리와 빛깔을 터트린다도시인들 자존심도 태양 아래서 가식의 옷을 벗는다 영혼이 푸른 더벅머리 나무 위로 하얀 물고기들 흘러간다도시의 자존심을 물에 헹군다 발가벗고 물장구치던 더벅머리 아이들 여름이 가위로 잘려나가기 전 다시 한번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슬픈 도시를 영롱한 눈빛으로 채운다​​​​이효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춘천 호반​

나트랑 가다 / 이효

그림 / Galina Lintz 나트랑 가다 / 이효 구름은 여행자의 꿈을 싣고비행기 의자는 고단한 하루를 눕힌다 바다를 건너온 지친 마음은잠시 유실물 보관소에 맡긴다 오후 3시로 기운 낯선 풍경코를 세운 비행장의 이국적 내음 저녁을 먹고 찾아간 베트남 재래시장 유순한 망고는 노란 겉옷을 벗고 나트랑의 향기를 움켜잡는 바나나는 손을 펼쳐 악수를 청한다 잡을까 말까하기야 인생 노랗게 익었으면 그만이지 모국어는 타국에서도 귓전에 꽂힌다“천 원이요” “천 원” 호주머니에서 꺼낸 구겨진 화폐퇴계 이황의 얼굴이 슬픈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