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133

수선화는 피었는데 / 이 효

​ ​ ​ 수선화는 피었는데 / 이 효 ​ ​ 창문을 열어 놓으니 봄바람이 곱게 머리를 빗고 마당에 내려앉는구나 ​ ​ 마당에 노란 수선화가 활짝 피었는데 창문에 걸터앉아 꽃을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구름처럼 간데없구나 ​ ​ 수선화도 서러운지 봄 노래를 부르려다 하늘에 쉼표 하나 그린다 꽃버선 신고 떠나신 하늘길 어머니 얼굴 수선화처럼 화안하다 ​ ​ ​ ​ ​ ​ 어머니! 일 년 반 동안 암 투병을 하셨습니다. ​ 한 통에 전화를 받았다. 쓰러진 나무를 세워 보았지만 나무는 뜨거운 화장터를 찾아야 했다. 코로나로 서울에는 회장 터가 없단다. 태백까지 다녀오란다. 미친 세상인지는 알았지만 내가 먼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 어머니 병상에 누워 계실 때 오미크론 확산이 심했다.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

사진관 앞에서 / 이 효

그림 / 용 한 천 (개인전)​ ​ ​ ​ 사진관 앞에서 / 이 효 ​ ​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던 어린 날 붉은 벽돌 사진관 앞에 걸린 낯선 가족사진 한장 나비넥타이 매고 검정 구두 신은 사내아이 내 볼에 붉은 복숭아꽃 핀다 그 많던 가족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여윈 어깨의 검정 구두 남자도 홀로 액자 속을 걸어 나온다 사진관 불빛이 사라진 자리 젖은 바람 텅 빈 액자 속을지나 내 마음 벌판에 걸린다 ​ ​ ​ 출처 / 신문예 (106호)​ ​ ​

가을이 오면 / 이 효

그림 / 권 현 숙​ ​ ​ ​ 가을이 오면 / 이 효 ​ ​ ​ 수국 꽃잎 곱게 말려서 마음과 마음 사이에 넣었더니 가을이 왔습니다 ​ 뜨거운 여름 태양을 바다에 흔들어 빨았더니 가을이 왔습니다 ​ 봄에 피는 꽃보다 붉은 나뭇잎들 마음을 흔드는 것은 당신 닮은 먼 산이 가을로 온 까닭입니다 ​ 멀리서 반백의 종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올 때면 무릎 꿇고 겸손하게 가을을 마중 나갑니다 ​ ​ ​ ​ 신문예 109호 수록 (가을에 관한 시)​ ​ ​ ​

신지도 / 이 효

그림 / 김 건 순 ​ ​ ​ 신지도 / 이 효 더위를 업고 달려간 신지도 수평선 위 작은 섬 하나 거울 앞에 홀로 선 내 모습 같구나 뜨거운 여름, 또 다른 섬 하나 두 다리를 오므리고 누운 모습 생명을 품은 여인의 신비한 몸 같구나 볼록한 섬이 갈라지더니 해가 오른다 얼마나 간절히 소망했던 생명인가 섬이 터트린 양수는 남해를 가득 채운다 철썩거리는 분침 소리 섬은 새벽 진통을 마치고 고요하다 하늘 자궁문이 열린 자리에는 수만 송이의 동백꽃이 피어오른다 고통의 주머니에서 꺼낸 한여름의 꿈이 화안하다 ​ ​ ​

배경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배경 / 이 효 당신은 한 평생 누군가에게 배경이 되어준 적 있는가? 젊은 연인들을 보아라 오래된 회색 집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찰칵 나의 배경은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되지 못한 가난함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걸어 놓은 것 낡은 집에 주인은 바로 나 오래전에 떠난 푸른 나무들이 붉게 물들어 찾아오는 집 낡은 가로등이 보잘것없는 나를 환하게 비친다

수국 / 이 효

그림 / 이 효 ​ ​ ​ ​ 수국 / 이 효 ​ 마음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지운다는 것은 회오리바람 화병에 달덩이만한 수국을 손으로 뭉개면서 알게 되었다 ​ 지우면 지울수록 내면에서 올라오는 짙은 색들 꺼내놓으면 감당할 수 없을까 봐 세월로 눌러 놓았던 아픈 흔적들 ​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얼굴 항아리안에서 더욱 익어가는 그리움 세월이 가면 더 환해지는 수국 하루 종일 마음에 모진 붓질을 한다 ​

강물로 그리는 새벽 별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강물로 그리는 새벽 별 / 이 효 ​ ​ 새벽 창가에 앉아 푸른 강물에 그림을 그립니다 흔들리는 나뭇잎으로 시를 쓰듯 절재된 마음을 그립니다 ​ 아주 오랜 세월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혼절한 사랑 구름과 눈물방울 비벼서 붉은 나룻배를 그립니다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인연 조용히 떠나보냅니다 ​ 어차피 인생이 내가 그리는 한 점에 그림이라면 이제는 슬픈 강물이 되지 않으렵니다 창가에 앉아있는 소녀는 세월을 삼키고 오늘도 푸른 강물에 마음을 그립니다 ​ ​ 휑한 마음, 새벽 별 하나 안고 홀로 걸어갑니다. ​ ​ ​ ​ 사진 / 청송 주산지

해바라기 / 이 효

그림 : 차 정 미 ​ ​ ​ 해바라기 / 이 효 ​ ​ 차마 당신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한곳을 향해서 달려가던 마음이 슬픈 자화상 속으로 걸어갑니다 ​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어린 자식을 키워내고 늘 해바라기처럼 반듯하게 살았는데 ​ 아닙니다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입안에 자갈을 물고 살았는데 왜 이제서야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당연히 여겨지지 않는지 ​ 고개를 들고 있는 저 노란 해바라기에게 묻고 싶습니다 태양 속으로 걸어들어가면 타버리는지? 재로 남을지언정 가보고 싶습니다 ​ ​ 늦은 오후 해바라기가 돌아서는 까닭은 한 장의 종이 위에 펄떡이는 마지막 숨을 시 한 방울로 해바라기를 그리고 싶습니다. ​ ​ ​ ​ 그림 / 차 정 미

담장 안의 남자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 담장 안의 남자 / 이 효 ​ ​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수다 소리 남자가 하루 세끼 쌀밥 꽃만 먹는다 내게 말을 시키지 않으면 좋겠어 드라마를 보면 왜 찔찔 짜는지 ​ 남자는 억울하단다 죄가 있다면 새벽 별 보고 나가서 자식들 입에 생선 발려 먹인 것 은퇴하니 투명인간 되란다 한 공간에서 다른 방향의 시선들 ​ 담장이 너무 높다 기와가 낡은 것을 보니 오랫동안 서로를 할퀸 흔적들 흙담에 지지대를 세운다 ​ 나이가 들수록 무너지는 담을 덤덤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자 남자는 거울 속 여자가 낯설다 ​ 벽에다 쏟아부었던 메아리 담장 안의 남자와 담장 밖의 여자 장미꽃과 가시로 만나 끝까지 높은 담을 오를 수 있을까 ​ ​ ​ ​ ​ ​

거미줄에 은구슬 / 이 효

​ ​ ​ 거미줄에 은구슬 / 이 효 ​ ​ 비 갠 아침 거미줄에 매달린 은구슬 누런 고무줄보다 질긴 바람에도 펄럭이고 나부꼈을 거미줄 같은 엄마의 하루 ​ 한평생 끊어질 듯 말 듯한 거미줄 닮은 엄마 목에 투명한 은구슬 따다가 살짝 걸어 드렸더니 거미줄에 엄마 눈물 매달린다 ​ 열 손가락 활짝 펴서 엄마 나이 세어 보다가 은구슬 세어 보다가 떨어지는 은구슬 안타까워 살며시 손가락 집어넣는다 ​ 산 입에 거미줄 치겠니 하던 엄마의 목소리 멀어질 때 아침 햇살에 엄마 나이 뚝 하고 떨어진다. ​ ​ ​ 신문예 107호, 2021 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