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162

청산도의 봄 / 이 효

그림 / 이 효 ​ ​ ​ ​ 청산도의 봄 / 이 효 ​ 굽은 허리 밭두렁 흙 묻은 치맛자락 푸른 남해에 담가 하늘에 펼쳐 더니 유채꽃 한가득 나비가 난다 청보리 휘날리고 무너진 돌담길 아래로 노란 안부가 물든다 할미 텃밭 사라진 자리 꽃밭이 자꾸 늘어난다 양산 쓴 서울 양반들 할미 돌무덤에 올라가 찰칵 청산도 노란 물결에 흔들린다 멀리서 들리는 뱃고동 소리 밭을 갈 사람 어디 없소 점점 멀어지는 할미 목소리 청산도의 봄은 노랗게 미쳐간다 ​ 출처 / 한국 시학 2023 봄 (65호) ​ ​ ​ ​

내레이션 / 이 효

그림 / 유진 ​ ​ ​ ​ 내레이션 / 이 효 ​ 천년을 앞산과 눈 맞춤하더니 여자는 꽃으로 타들어 간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일까 누군가 일 년도 기다리지 못한 사랑 수없이 벙긋거린 입들 밤마다 별을 보고 달을 보았을 가슴속에 꾹꾹 누른 천년 붉게 달덩이 피어오른 불암산 서로의 가시를 눈 안에 앉히는 가시가 녹아 꽃봉오리 펼치는 서로의 강에 비춰보는 온몸으로 전하는 4월의 환희 이효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 ​ ​ ​

사월의 비가(悲歌) / 이 효 ​

그림 / 김정수 ​ ​ ​ 사월의 비가(悲歌) / 이 효 ​ ​ ​ 자색 빛 목련 따라 아침마다 발걸음 꽃그늘 아래 멈춘다​ 오월이 오는 소리에 ​ 목련 꽃잎 떨어질 때면 내 심장도 검게 탄다 ​ 이른 아침 떠나는 너​ 향기라도 남겨두고 떠나라 아파트 경비 아저씨​ 하늘로 곧게 세운 빗자루 모질게 누런 꽃잎 턴다 ​ 하루만 더 기다려주지 할머니가 털 난 짐승 모질다 했다​ 오늘 보았다 모진 짐승 나랑 똑같이 닮은 ​ 꽃무덤이 된 사월의 편지들 ​ ​ ​​ ​ ​

한강, 심장은 춤추고 싶다 / 이 효

그림 / 김정래​ ​ ​ ​ ​ 한강, 심장은 춤추고 싶다 / 이 효 ​ 물새 발자국 따라가니 천년 뱃사공 노래 흐른다 한강의 싱싱했던 눈 아파트 병풍에 둘러싸여 백내장 걸린다 푸른빛을 잃어버린 백제의 유물처럼 건져 올린 죽은 물고기 떼, 녹슨 비늘 펄펄 뛰던 꿈은 비린 표정 비누 거품 집어삼킨 물고기들 점점 부풀어 오른 탄식 맑게 흘러가야 사람이고 강물이지 강물을 빠른 우편으로 부친다 ​ ​ ​ ​ 월간 신문예 (4월호) ​ ​ ​ ​

소리를 꿰매는 법 / 이 효

그 림 / 송인관 ​ ​ ​ 소리를 꿰매는 법 / 이 효 ​ ​ 겨울바람이 쿨럭이면 트고 갈라진 입술을 비좁은 창문 틈에 대고서 달동네는 밤새 휘파람을 불었다 손수레에 쪽방을 끌고 가는 노파 고물상으로 가는 길, 바퀴 터지는 소리 사이로 지난겨울 맹장 터진 어린 손주의 비명이 걸어 나온다 어미는 어디로 갔는지 성냥갑 닮은 쪽방에 아이 하나 촛농처럼 식어간다 자원봉사자들 연탄 나르던 비탈진 골목길 재개발 소식에 이웃들 불꽃 꺼지듯 사라지고 반쯤 열린 대문 앞 빨간 고무대야 속에는 지난여름을 박제시킨 꽃들이 떠난 이웃의 말라버린 이름을 솎아낸다 이른 새벽에 파지 줍는 세월은 바늘귀에 침묵을 꿰어 기울어가는 생을 덧대는 일이다 조각보처럼 이어온 날짜들이 노파의 입가에 주름처럼 세 들어 산다 당고개역 잡화가게 ..

검정 고무신 / 이 효

그림 / 허경애 검정 고무신 / 이 효 내 친구 옥이가 동창회에 나왔다 검정 고무신 신고 나왔다 질긴 고무신을 닮은 친구 유방암을 이겼다 흰 물감을 꺼냈다 옥아! 나이키 상표 하나 그려줄까 친구가 씩 웃는다 어, 조선 나이키 고무신 신고 친구랑 보름달 속을 걷는다 광화문에 함박꽃 두 그루 피었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신창 시장, 긴 편지 / 이 효

그림 / 임천 신창 시장, 긴 편지 / 이 효 할멈을 끌고 간다 언제 어디서나 부르면 굴러온 작은 바퀴 이젠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이 없다 오늘은 할망구 생일 밥상에 덜렁 혼자 앉으니 지난 세월 허두 미안혀 울컥 생목 오른다 석탄 같이 타들어간 당신 먼저 하늘로 보낸 것 같아 신창 시장 달달달 돌며 매일 용서를 구한다 천천히 가유 영감 귓전에 들리는 할멈 목소리 화들짝 놀라 뒤돌아 보니 늙은 아이 홀로 긴 편지 끌고 간다 시집 / 도봉열전 (도봉 문화원) *우리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다

벽속의 어둠 / 이 효

그림 / 이경수 벽속의 어둠 / 이 효 흔들리는 나뭇잎이라도 잡고 싶습니다 나뭇잎도 작은 입김에 흔들리는데 아! 하나님 당신의 숨 한 번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하얀 침대 위 어머니 얼음이 되어간다. 태어나서 스스로 가장 무능하게 느껴진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초라함에 울음도 표정을 잃어버린다. 눈물마저 원망스러운데 창문 넘어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 가지 끝 미세한 흔들림이 눈동자를 찌른다. 아니 그 떨림을 잡고 싶었다. 간절한 기도가 눈발로 날린다. 당신의 숨 한 번 불어주시길~~ 오! 나의 어머니

새해가 내려요 / 이 효

그림 / 이 봉 화 새해가 내려요 / 이 효 꿈틀거리는 지난 시간의 내장들 끊어진 소통 위로 눈이 내린다 방전된 몸으로 새해를 넘어온 사람들 아픈 손톱에 첫눈을 발라준다 뾰얀 속살이 차곡 쌓인 달력을 단다 말풍선에 매달란 섬들이 소통하고 유리벽을 타는 용서가 녹아내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가 찰칵 찍어 놓은, 첫눈 오는 날 핸드폰 속에서 풍겨오는 사람 내음 눈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그렁한 눈발로 묻는다 까똑 까똑 까똑 *신문예 1월의 시 / 이 효

고향에 핀 도라지꽃 / 이 효

그림 / 김정수 고향에 핀 도라지꽃 / 이 효 밥상에 오른 도라지나물 고향 생각난다 할머니 장독대 도라지꽃 어린 손녀 잔기침 소리 배를 품은 도라지 속살 달빛으로 달여 주셨지 세월이 흘러 삐걱거리는 구두를 신은 하루 생각나는 고향의 보랏빛 꿈 풍선처럼 부푼 봉오리 두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면 펑하고 터졌지 멀리서 들리는 할머니 목소리 애야, 꽃봉오리 누르지 마라 누군가 아프다 아침 밥상에 도라지나물 고향 생각하면 쌉쏘름하다 이효시집 / 당신의 숨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