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이효자작시 18

사진관 앞에서 / 이 효

그림 / 용 한 천 (개인전)​ ​ ​ ​ 사진관 앞에서 / 이 효 ​ ​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던 어린 날 붉은 벽돌 사진관 앞에 걸린 낯선 가족사진 한장 나비넥타이 매고 검정 구두 신은 사내아이 내 볼에 붉은 복숭아꽃 핀다 그 많던 가족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여윈 어깨의 검정 구두 남자도 홀로 액자 속을 걸어 나온다 사진관 불빛이 사라진 자리 젖은 바람 텅 빈 액자 속을지나 내 마음 벌판에 걸린다 ​ ​ ​ 출처 / 신문예 (106호)​ ​ ​

가을이 오면 / 이 효

그림 / 권 현 숙​ ​ ​ ​ 가을이 오면 / 이 효 ​ ​ ​ 수국 꽃잎 곱게 말려서 마음과 마음 사이에 넣었더니 가을이 왔습니다 ​ 뜨거운 여름 태양을 바다에 흔들어 빨았더니 가을이 왔습니다 ​ 봄에 피는 꽃보다 붉은 나뭇잎들 마음을 흔드는 것은 당신 닮은 먼 산이 가을로 온 까닭입니다 ​ 멀리서 반백의 종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올 때면 무릎 꿇고 겸손하게 가을을 마중 나갑니다 ​ ​ ​ ​ 신문예 109호 수록 (가을에 관한 시)​ ​ ​ ​

수국 / 이 효

그림 / 이 효 ​ ​ ​ ​ 수국 / 이 효 ​ 마음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지운다는 것은 회오리바람 화병에 달덩이만한 수국을 손으로 뭉개면서 알게 되었다 ​ 지우면 지울수록 내면에서 올라오는 짙은 색들 꺼내놓으면 감당할 수 없을까 봐 세월로 눌러 놓았던 아픈 흔적들 ​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얼굴 항아리안에서 더욱 익어가는 그리움 세월이 가면 더 환해지는 수국 하루 종일 마음에 모진 붓질을 한다 ​

6월의 우체통 / 이 효

그림 / 최 서 인 ​ ​ ​ 6월의 우체통 / 이 효 ​ ​ ​ 하루 종일 그녀의 생각을 나뭇잎에 담았더니 붉은 열매가 달렸습니다 ​ 그녀를 손끝으로 건드렸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놀라서 마음을 창문처럼 접습니다 ​ 창가에 턱을 괴고 오랜 시간 그녀를 바라봅니다 유월의 해가 떨어질 무렵 다시 용기를 내서 뜰로 나갑니다 ​ 내 마음은 강물처럼 흔들리는데 그녀의 붉은 입술은 숨 막힐 듯, 눈멀 듯, 곱기만 합니다 ​ 유월은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마음에 우체통 하나 세워놓고 달아납니다 ​ ​ ​ ​ ​

카테고리 없음 2021.06.18

강물로 그리는 새벽 별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강물로 그리는 새벽 별 / 이 효 ​ ​ 새벽 창가에 앉아 푸른 강물에 그림을 그립니다 흔들리는 나뭇잎으로 시를 쓰듯 절재된 마음을 그립니다 ​ 아주 오랜 세월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혼절한 사랑 구름과 눈물방울 비벼서 붉은 나룻배를 그립니다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인연 조용히 떠나보냅니다 ​ 어차피 인생이 내가 그리는 한 점에 그림이라면 이제는 슬픈 강물이 되지 않으렵니다 창가에 앉아있는 소녀는 세월을 삼키고 오늘도 푸른 강물에 마음을 그립니다 ​ ​ 휑한 마음, 새벽 별 하나 안고 홀로 걸어갑니다. ​ ​ ​ ​ 사진 / 청송 주산지

해바라기 / 이 효

그림 : 차 정 미 ​ ​ ​ 해바라기 / 이 효 ​ ​ 차마 당신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한곳을 향해서 달려가던 마음이 슬픈 자화상 속으로 걸어갑니다 ​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어린 자식을 키워내고 늘 해바라기처럼 반듯하게 살았는데 ​ 아닙니다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입안에 자갈을 물고 살았는데 왜 이제서야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당연히 여겨지지 않는지 ​ 고개를 들고 있는 저 노란 해바라기에게 묻고 싶습니다 태양 속으로 걸어들어가면 타버리는지? 재로 남을지언정 가보고 싶습니다 ​ ​ 늦은 오후 해바라기가 돌아서는 까닭은 한 장의 종이 위에 펄떡이는 마지막 숨을 시 한 방울로 해바라기를 그리고 싶습니다. ​ ​ ​ ​ 그림 / 차 정 미

담장 안의 남자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 담장 안의 남자 / 이 효 ​ ​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수다 소리 남자가 하루 세끼 쌀밥 꽃만 먹는다 내게 말을 시키지 않으면 좋겠어 드라마를 보면 왜 찔찔 짜는지 ​ 남자는 억울하단다 죄가 있다면 새벽 별 보고 나가서 자식들 입에 생선 발려 먹인 것 은퇴하니 투명인간 되란다 한 공간에서 다른 방향의 시선들 ​ 담장이 너무 높다 기와가 낡은 것을 보니 오랫동안 서로를 할퀸 흔적들 흙담에 지지대를 세운다 ​ 나이가 들수록 무너지는 담을 덤덤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자 남자는 거울 속 여자가 낯설다 ​ 벽에다 쏟아부었던 메아리 담장 안의 남자와 담장 밖의 여자 장미꽃과 가시로 만나 끝까지 높은 담을 오를 수 있을까 ​ ​ ​ ​ ​ ​

거미줄에 은구슬 / 이 효

​ ​ ​ 거미줄에 은구슬 / 이 효 ​ ​ 비 갠 아침 거미줄에 매달린 은구슬 누런 고무줄보다 질긴 바람에도 펄럭이고 나부꼈을 거미줄 같은 엄마의 하루 ​ 한평생 끊어질 듯 말 듯한 거미줄 닮은 엄마 목에 투명한 은구슬 따다가 살짝 걸어 드렸더니 거미줄에 엄마 눈물 매달린다 ​ 열 손가락 활짝 펴서 엄마 나이 세어 보다가 은구슬 세어 보다가 떨어지는 은구슬 안타까워 살며시 손가락 집어넣는다 ​ 산 입에 거미줄 치겠니 하던 엄마의 목소리 멀어질 때 아침 햇살에 엄마 나이 뚝 하고 떨어진다. ​ ​ ​ 신문예 107호, 2021 5/6 ​

창문 앞에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창문 앞에 / 이 효 ​ 텅 빈 마음이 싫어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다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 것은 나의 마음을 여는 것 ​ 세상이 온통 흑백 사진 같을 때 나는 매일 아침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다 세상 사람들 미소가 하늘에 맑은 구름처럼 걸릴 때까지 ​ 이제껏 사는 게 너무 바빠서 창문 앞에 꽃 한 송이 변변히 내어 놓지 못했다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일 ​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 일은 마음에 별을 하늘에 거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