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이효자작시 20

창문 앞에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창문 앞에 / 이 효 ​ 텅 빈 마음이 싫어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다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 것은 나의 마음을 여는 것 ​ 세상이 온통 흑백 사진 같을 때 나는 매일 아침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다 세상 사람들 미소가 하늘에 맑은 구름처럼 걸릴 때까지 ​ 이제껏 사는 게 너무 바빠서 창문 앞에 꽃 한 송이 변변히 내어 놓지 못했다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일 ​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 일은 마음에 별을 하늘에 거는 일이다 ​

호박에 관하여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호박에 관하여 / 이 효 ​ 벽 같은 영감탱이라고 밤낮 소리 질렀는데 그래도 못난 마누라 배 나왔다고 등 받쳐주는 건 당신뿐이구려 ​ 내 손바닥 거칠다고 손 한 번 잡아주지 않더니 간밤에 슬며시 까칠한 잎 담장 위에 올려놓은 건 당신뿐이구려 ​ 이웃집 늙은 호박 누렇게 익어 장터에 팔려 나갔는데 시퍼렇게 익다만 내게 속이 조금 덜 차면 어떠냐고 한 번 맺은 인연 끈지 말자며 투박한 말 건넨 건 당신뿐이구려 ​ 둥근 호박 메달은 긴 목 바람에 끊어져 나갈까 봐 몸에 돌을 쌓고 흙을 발라서 바람 막아주는 건 당신뿐이구려 ​ 영감, 조금만 참아주시오 내 몸뚱이 누렇게 익으면 목줄 끊어져도 좋소 당신을 위해서라면 호박죽이 될망정 뜨거운 가마솥에 들어가리라 ​ 늙어서 다시 한번 펄펄 끓고 ..

가을을 견디다 ( 자작 시)

가을을 견디다 / 이 효 가을이 오면 말문이 터진다 목구멍 깊이 밀어두었던 그리움이 꽃으로 핀다 봄에는 벚꽃이 환해서 울음을 참는다. 가을에는 벚나무 잎이 곪아 붉은 꽃으로 핀다 인생을 한 번쯤 곪아보지 않고 세월을 말하지 말자 가을은 아픈 사람들끼리 바스락거리는 심장을 안고 꺽꺽 울어주는 것이다. 오늘도 길거리로 나선다 낮은 곳에서 들리는 기도 소리 빨갛게 불타오른다. 뜨겁다.

가을 눈동자 (자작 시)

가을 눈동자 / 이 효 누이가 오려나? 마을 어귀에 노란 국화 켜놓았다 짧은 햇살에 동네 처녀들 치맛자락 들고 뛰노는데 서울로 돈 벌러 간 누이는 오지 않는다 햇살을 빨랫줄에 매달아 논다 깜박 졸고 있는 사이 해는 손가락 사이로 빠졌나간다 밤새도록 가을 나무에 떼울음 붉게 매달아 논다 노랗게 그리움 가지마다 속울음 익는다 이른 아침 먼저 마중나간 눈동자들 마을 어귀가 화안하다

미련한 곰 (자작 시)

​ 미련한 곰 / 이 효 ​ 아침 산책길 나무 아래 널브러진 잣 껍질 사람들 발에 밟힌다 울음소리 등이 휜다 ​ 그 많던 잣은 어디로 갔을까? 텅 빈 잣 껍질 속 마른 새 울음소리 들린다 ​ 자식들 대학 간다고 전깃줄에 달 매달아 놓고 검정 눈알 하나씩 빼주었다 ​ 늦은 밤 가계부에 붉은 백일홍 만개한다 돋보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노망이 따로 없다 ​ 자식들은 알려나 남보다 한발 앞서라고 눈알이란 눈알 모두 빼주었는데~ ​ 수십 개의 눈알 옷에 달고도 길이 안 보인다 한다. 남은 껍질이라도 태워 길을 밝혀주어야 하나? ​ 세상 제일 미련한 동물이 노년에 동물원에 갇혔다 길을 잃어버렸다 ​ 동물원 팻말에 원산지는 미련한 곰이라 쓰여있다. ​

꽃구경 가자 (자작 시)

꽃구경 가자 / 이 효 ​ 얘야 꽃이 피었구나 꽃구경 가자 ​ ​ 모두가 잠든 밤 당신 검게 그을린 폐 붉은 꽃 한 조각 펼쳐 놓고 가슴에 바느질하는 소리 딸에게 전화를 건다 ​ ​ 아버지 왜요? 새벽이잖아요 동트면 일나가야 해요 찰칵~ ​ ​ 얘야 꽃구경은 다리 힘없다 목소리가 듣고 싶구나 뚜뚜뚜~ ​ 당신은 그렇게 가셨습니다 꽃이 피면 미안했습니다 붉은 꽃이 피면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 ​ 멀리서 웃어 주시는 아버지 옷자락이 너무 얇아서 꽃무늬 가득한 가을 산자락 끌고 왔습니다.

조연 꼬리표

조연 꼬리표 / 이 효 ​ 파란 하늘이 내려온다 구름이 땅 같고 땅이 구름 같구나 무대 위 서서히 춤추는 무희 속은 울고 있다 외다리 무희 아픔 골 깊다 ​ 무대 앞 우뚝 솟은 산 누런 잎에 녹아내린 세월 전쟁터에서 승리한 적장은 꽃다발 던진다 피 묻은 겉옷 흰옷 갈아입는다 ​ 내 안에 포로는 속삭인다 새벽이 오기 전에 떠나자 양철 같은 둥근 모자 쓰고 깃털을 단다 적지를 탈출하는 풀 피리 소리 무음으로 떤다 ​ 파란 하늘에서 양발로 자유롭게 춤추는 그날까지 조연 꼬리표 하늘에 펄럭인다 춤추는 무희의 눈물 한 방울 가을 산 활활 태운다. ​ ​ ​

화악산 아래서 (자작 시)

화악산 아래서 / 이 효 터널을 빠져나오면 아담한 정자 하나 정자 옆 작은 연못 송사리 떼 지어 피었다. 여름은 산자락 움켜잡고 파란 하늘로 달아난다 계곡의 찬바람은 등을 타고 허기를 채운다. 불량한 세상 언제쯤 코로나 터널 빠져나오려나? 문짝 없는 정자 옆 꽃노래 듣고 싶어라 송사리 떼 잡으러 가는 바람 부서진 사람들 마음 엉거주춤 끌어올린다 해 질 녘 구름을 더듬듯 마음을 꽃그늘 아래 잠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