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이효시인 9

감나무와 어머니

감나무와 어머니 이 효 당신과 함께 심었습니다 손가락만 한 감나무 돌짝밭 손끝이 닳도록 함께 땅을 파내려 갔습니다 주님은 햇살을 끌어다 주시고 가족은 새벽을 밀었습니다 오늘, 그 감을 따야 하는데 당신은 가을과 함께 먼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식탁 위 접시에 올려진 감 하나 차마 입으로 깨물지 못합니다 한평생 자식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헌신을 온몸으로 땅에 쓰고 가르치신 어머니 그렁한 내 눈은 붉은 감빛이 되었습니다 *오랜동안 블로그를 비웠습니다. 늦은 가을에 어머님을 보내고 다시 마음을 추슬러봅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2023년 마지막 겨울입니다. 블친님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 이효

작품 / 한치우​ ​ ​ ​ ​ ​​ ​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 이효 ​ ​ ​ 입맞춤을 연습해 본 적이 없어 광신도가 춤을 추던 그날 밤 생명이 자궁에 바늘처럼 꽂혔지 아빠라는 단어를 사막에 버린 남자 무표정한 가을이 오고, 혈액형을 쪼아대는 새들 끊어진 전선으로 반복된 하루 딱 한 번의 입맞춤 눈빛이 큰 불을 지핀 거야 모든 삶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 매일 밤, 암막 커튼을 치고 바다로 가는 꿈을 꿔 나쁜 생각들이 골수를 빼먹어 아비도 없는 애를 왜 낳으려고 하니? 이름도 모르는 신에게 아가 울음을 택배로 보낼 수 없잖아 나는 썩지 않는 그림자니까 어느 날, 종소리가 달팽이관을 뚫고 아기 숨소리 깃털이 된다 생명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거래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세상에 두 번째 입맞춤을 알릴 ..

내레이션 / 이 효

그림 / 유진 ​ ​ ​ ​ 내레이션 / 이 효 ​ 천년을 앞산과 눈 맞춤하더니 여자는 꽃으로 타들어 간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일까 누군가 일 년도 기다리지 못한 사랑 수없이 벙긋거린 입들 밤마다 별을 보고 달을 보았을 가슴속에 꾹꾹 누른 천년 붉게 달덩이 피어오른 불암산 서로의 가시를 눈 안에 앉히는 가시가 녹아 꽃봉오리 펼치는 서로의 강에 비춰보는 온몸으로 전하는 4월의 환희 이효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 ​ ​ ​

달걀부침과 미스코리아 / 이 효

그림 / 이기호 달걀부침과 미스코리아 / 이 효 어린 딸내미 밥 수저 위에 올려주던 노란 달걀부침 볼은 주먹만 한 풍선 꼭꼭 씹어라 하나 둘 셋··· 서른 꿀꺽 아이고 우리 딸 미스코리아 되겠네 어른이 되어서 노란 꽃밭이 되라는 아버지 말씀 프라이팬 위에서 자글거린다 나는 왜, 아직도 미스코리아가 되지 못했나 볼에 노른자 주룩 흐른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바늘귀 / 이 효

그림 / 문미란 바늘귀 / 이 효 이불 꿰매는 엄마 바늘귀에 실은 혀끝을 더듬는다 엿가락 뽑듯 길게 당긴 늘어진 오후 요년, 시집 멀리 갈래 엄마, 실을 길게 꿰면 새들이 수평선 넘어가 싫어, 소라와 게처럼 살래 대답은 빨랫줄에서 웃는다 햇살이 싹둑 잘린 오후 줄에 풀 먹인 유년이 펄럭인다 짧은 눈썹 같은 대답이 유순해진다 그녀는 구름 위에 신방을 꾸민다 그날 이후 딸년의 낭창거리는 목소리 들리지 않는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나침반 / 이효

그림 / 송민자 나침반 / 이효 푸르릉거리는 나비 한 마리 아버지 배낭 안에서 찾는 길 더덕이랑, 쑥이랑, 곰취랑 산등성에 봄내음 캔다 아버지 실웃음 링거에 걸고 하얀 꽃잎 위에 누운 날 이 빠진 풍금 소리 딸내미 가슴 음표 없는 울음 아버지의 배낭 속 지구만 한 나침반 숲에서 길을 잃은 발자국 소리가 절벽에 매달릴 때 초침 같은 남자의 미소 아버지 얼굴에 앉은 나비 나침반 위에 옮겨 앉으면 그 자리에 숲길이 환하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당신의 숨 한 번 / 이 효

해설 ‘숨’과 ‘쉼’의 풍경을 읽다 나호열 (시인 · 문학 평론가)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보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기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며, 또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기적奇跡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인과의 법칙을 넘어서서 이루어지는 것, 어떤 절망적 상황이 순식간에 극복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기적이 필요하지 않은 평온한 삶이다. 기적이 요구되지 않는 삶, 언제든 쉬고 잠잘 수 있는 집이 있고, 언제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넉넉한 양식糧食이 비축되어 있는, 어찌 보면 판에 박힌 쳇바퀴를 돌리는 삶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