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70

202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그림 / 김정현 2025년 농민신문 신춘 당선 시 모란 경전 / 양점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 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 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 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

염천(炎天) / 마경덕

​염천(炎天) / 마경덕​ 산기슭 콩밭에 매미울음 떨어짝을 찾는 쓰르라미 울음이 대낮 콩밭보다 뜨겁다이놈아 그만 울어!불볕에 속곳까지 흠뻑 젖은 할망구등 긁어줄 영감 지심* 맬 딸년도 없어 더 속이 쓰리다호미 날에 바랭이 쇠비름 명아주 떨려 나가고청상으로 키운 아들이 죽고 콩밭짓거리*로김치 담궈 올린 외며느리에게서 떨려 나온 할멈도쓰름쓰름 다리 뻗고 울고 싶은데그동안 쏟아버린 눈물이 얼마인지, 평생 울지 못하는암매미처럼 입 붙이고 살아온 세월슬픔도 늙어 당최 마음도 젖지 않고콩 여물듯 땡글땡글 할멈도 여물어서이젠 염천 땡볕도 겁나지 않는다팔자 센 할멈이나 돌밭에 던져지는 잡초나독하긴 매한가지살이 물러 짓무르는 건 열이 많은 열무손끝만 스쳐도 누렇게 몸살을 탄다호랭이도 안 물어가는 망구도 살이 달고열무같이..

우린 안부를 묻지 않아도 / 박 순

그림 / 이수아​​ 우린 안부를 묻지 않아도  / 박 순  ​밤새, 먼지 뒤집어쓰며 가슴 움켜쥐며피 토하며 돌렸던 기계들소주잔 기울이며 신라면 안주 삼아가는 곡소리에내 숨통을 조였다고왜 벌써 가냐고 주먹을 허공에 휘두른다앙다문 입술오른쪽으로 기울인 어깨화장化粧 못해 새까만 얼굴로 누워있던 그 사람불편한 진실에 고개 흔들던 그 밤난 왜 모르고 살았을까한파가 몰아친다 ​ ​시집 / 바람의 사원​

바람의 사원 / 박 순

바람의 사원 / 박 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몰랐다구부러진 길을 갈 때 몸은 휘어졌고발자국이 짓밟고 지나간 자리에는 꽃과 풀과 새의 피가 흘렀다바람이 옆구리를 휘젓고 가면돌멩이 속 갈라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바람의 늑골 속에서 뒹구는 날이 많았다바람이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고 채찍질을 하면 바람보다 더 빨리 달릴 수밖에 없었다질주본능으로 스스로 박차를 가했던 시간들옆구리의 통증은 잊은 지 오래일어나지 못하고 버려졌던검은 몸뚱이를 감싼 싸늘한 달빛그날 이후내 몸을 바람의 사원이라 불렀다 ​​  시집 / 바람의 사원

벽 / 추성은(202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 ​ ​ ​ 벽 / 추성은 (202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 ​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 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

너 명상 속에 들어와 봐 / 노창수

그림 / 김한겸 ​ ​ ​ ​ ​ ​ 너 명상 속에 들어와 봐 / 노창수 ​ ​ ​ 요즘 근황 좀 물어봐 노을 속 가랑잎이지 브람스처럼 젖으며 도톰히 낳고 지나치다 잎 떨궈 사라질 무념 투명히도 부르지 ​ 잠 깨워 손 잡으면 공수거로 헤어지지 비듬의 생애 편린들 흔들며 털어내며 눈 감고 절기 외우다 늙은 팔로 저어가지 ​ 늦은 밤 침잠하듯 공수래도 얻게 되는 시든 다발 내다버리듯 가죽을 비우고 나서 정양수 빌린 미명을 촉루처럼 닦아 담지 ​ ​ ​ ​ ​ 노창수 시인 / 현대 시학 등단,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1979) ​ ​ 2023 한국시학 가을호 수록 ​ ​ ​ ​ ​ ​ ​​ ​ ​​ ​

초가을, 서쪽 / 김용택

그림 / 김한겸 ​ ​ ​ ​ ​ ​ 초가을, 서쪽 / 김용택 ​ ​ ​ 산 아래 동네가 참 좋습니다 벼 익은 논에 해 지는 모습도 그렇고 강가에 풀색도 참 곱습니다 나는 지금 해 지는 초가을 소슬바람 부는 산 아래 서 있답니다 산 아래에서 산 보며 두 손 편하게 내려놓고 맘이 이리 소슬하네요 초가을에는 지는 햇살들이 발광하는 서쪽이 좋습니다 ​ ​ ​ ​ 김용택 시집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나요 ​ ​ ​ ​ ​

선인장 / 박경희

© enginakyurt, 출처 Unsplash 선인장 / 박경희 살기 위해서다 푸른 잎이 가시로 변한 것도 몸통만 둥글게 부풀리는 것도 살기 위해서다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이고 긴 시간 버티어 본 적 있는가 생명의 푸른 기운 그것 지키려고 사방에 가시를 둔 거다 때로는 가시가 나를 찔러도 두껍게 풀은 옷 입고 버티는 거다 언제나 붉은 꽃 피우려고 견디는 거다. * 2023 월간 신문예 (120호)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정오의 언덕 / 서정주

© staceyhfc10, 출처 Unsplash 정오의 언덕 / 서정주 보지마라, 너 눈물어린 눈으로는... 소란한 홍소(哄笑)의 정오천심(正午天心)에 다붙은 내 입술의 피묻은 입맞춤과 무한 욕망의 그윽한 이 전율을... 아 ~~ 어찌 참을것이냐! 슬픈 이는 모두 파촉(巴蜀)으로 갔어도 윙윙거리는 불벌의 떼를 꿀과 함께 나는 가슴으로 먹었노라 시악시야! 나는 아름답구나 내 살결은 수피(樹皮)의 검은 빛 황금 태양을 머리에 달고 몰약(沒藥) 사향(麝香)의 훈훈한 이 꽃자리 내 숫사슴의 춤추며 뛰어가자 웃음 웃는 짐승, 짐승 속으로. 서정주 시집 / 화사집 *서정주 시인은 "지귀도" 라는 섬에 머물면서 방목된 사슴들을 보고 쓴 시다. *사슴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 욕구인 "성욕"과 "공격성"을 잘 드러낸 작품..

유리창 / 정지용

유리창 /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 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와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 갔구나 ! *정지용 연구 / 이승철 자식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난 서글픈 심정을 표현한 시다. 싸늘한 시신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죽음의 느낌과 자식 때문에 생긴 삶의 허전하고 막막한 공백감을 유리창의 차가운 촉각적 감각을 통해 아주 선명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이런 것을 촉각적 이미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