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아내 / 이경렬

그림 / 민경수 ​ ​ ​ ​ 아내 / 이경렬​ ​ ​ ​ ​ 곤하게 잠든 밤에도 꿈속에서조차 못 이기는 아픔 신음 소리에 몸을 뒤척인다 움직이는 종합병원이 된 지 오래된 몸 대장을 잘라낸 남편의 세끼 맞추기에 쉴 틈이 없다 "여보 설거지는 내가 하지" 집사람 물리고 그릇을 닦는데 누가 뒤에서 한마디 하는 것 같았다 "이놈아 진작 좀 그렇게 하지" 암 수술 받은 어느 남자가 그랬단다 천사와 함께 살면서도 이제껏 몰랐다고 그 사람도 나같이 멍청했나 보다 방에서 집사람 신음 소리가 또 들린다 저 소리가 이제야 아프게 들이다니 누군가 또 한 마디 한다 "이 사람아 지금도 늦지 않았네" ​ ​ ​ ​ ​ ​ 시집 / 인사동 시인들(2023) ​ ​ ​ ​ ​ ​ ​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 / 오정국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 / 오정국 매미가 허물을 벗는, 점액질의 시간을 빠져나오는, 서서히 몸 하나를 버리고, 몸 하나를 얻는, 살갖이 찢어지고 벗겨지는 순간, 그 날개에 번갯불의 섬광이 새겨지고, 개망초의 꽃무늬가 내려앉고, 생살 긁히듯 뜯기듯, 끈끈하고 미끄럽게, 몸이 몸을 뚫고 나와, 몸 하나를 지우고 몸 하나를 살려 내는, 발소리도 죽이고 숨소리도 죽이는, 여기에 고요히 내 숨결을 얹어 보는, 난생처음 두 눈 뜨고,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 ​ ​ 오정국 시집 / 파묻힌 얼굴 2011

현대시 / 김산​​

그림 / 후후 ​ ​ ​ ​ ​ 현대시 / 김산​ ​ ​ ​ 무언가 저쪽에서 오고 있었다 공기는 잠시 가던 길을 멈췄고 인파 속에서 고갤 갸웃거렸다 그는 불행히 발견되지 않았다 고로, 어떤 발생도 하지 않았다 모든 빛은 그늘이 남긴 배경이므로, 명백한 저녁을 그린 화가는 없다 실패한 비닐 창문의 구도 사이로 바람의 궁극을 윤문하는 한 마리 새 날개는 결국 장식적이고 현학적이다 그는 쓸데없는 안부를 생략한다 공장 굴뚝은 비약하는 고체의 빗줄기 안개의 기록은 이제 그만하기로 한다 울지도 웃지도 않는 이 세계에서 어떤 그림은 도저한 패국을 완성한다 우체국 직원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 퇴근 무렵의 종이박스는 딱딱한 표정이다 몰락을 그리는 화가는 흔해빠졌다 ​ ​ ​ ​ ​ 웹진 2015년 9월호 ​ ​ ​ ​ ..

감나무 / 이재무

그림 / 유영을 ​ ​ ​ ​ ​ ​ 감나무 / 이재무 ​ ​ ​ 감나무 저는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 보는 것이다 ​ ​ ​ ​ ​ *시집 : 청소년, 시와 대화하다 ​ ​ ​ ​ ​ ​ ​ ​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그림 / 홍종구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세월은 또 한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 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 비는 재주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이 초란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인가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 본다 밖에는 바람 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시집 / 청소년, 시와 대화하다

마음 / 김광섭

그림 / 김정수 마음 /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시집 /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 100선

환절기 / 조은영

그림 / 이종석 ​ ​ ​ ​ 환절기 / 조은영 ​ ​ ​ 잠들지 못한 사람들이 수화기를 쥐고 있다 너는 물이 많은 사주를 가졌구나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뿌리째 연결음에 매달린 사람들 생활의 자전 속에 자꾸 넘어지는 마음 밤이 등을 돌려 울고 있는 달을 안고 있다 ​ 주먹을 쥐고 울어도 손아귀는 힘이 없어 마르지 않는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나날 ​ 축축한 손의 질기로 흙을 빚는다 눈물을 담을 수 있는 잔만큼 손끝으로 넓이와 깊이를 만든다 물레의 방향에 끌려가지 않도록 지탱하는 왼손 오른 손가락 끝에 힘을 모은다 ​ 물레가 돈다 원심력을 손끝으로 끌어 올린다 절정에 다다른 기물 자름실은 물레의 반대 방향으로 지나간다 질기가 만든 잔을 가마에 넣는다 ​ 손끝에 힘을 준다 원을 그리며 춤을 춰야지 방향을 바꿔 ..

눈을 감고 깊어지는 날 / 이현경

​ ​ ​ ​ ​ 눈을 감고 깊어지는 날 / 이현경​ ​ ​ 누가 눈동자를 메우고 있나 ​ 몇 걸음 안 되는 곳에서도 자식을 선뜻 알아보지 못한다 ​ 어린 자식들 눈에 언어를 깨우쳐 주던 동공에는 해가 기울고 시간의 물결을 건너가는 동안 한 여인의 삶이 출렁인다 ​ 낮은 물결로 때로는 거친 너울로 삶을 뒤척이던 모든 생애 ​ 기억은 흐릿해지고 눈가에는 자식들이 흥분이 맺혀 있다 ​ 마음이 깊어지는 날 어머니가 차오른다 ​ ​ ​ ​ 이현경 시집 / 허밍은 인화되지 않는다 ​ ​ ​ ​​ ​

소녀 / 박소란

그림 / 신종식 ​ ​ ​ ​ 소녀 / 박소란​ ​ ​ ​ 한쪽 눈알을 잃어버리고도 벙긋 웃는 입 모양을 한 인형 다행이다 인형이라서 ​ 오늘도 말없이 견디고 있다 소녀의 잔잔한 가슴팍에 안겨서 ​ 소녀는 울음을 쏟지 않고 아픈 자국을 보고도 놀라지 않지 슬픔은 유치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 ​ 갈색과 녹색처럼 헷갈리기 쉬운 것 ​ 스케치북 속 흐드러진 풍경은 갈색 철 지난 이불에 파묻혀 앓는 엄마 얼굴은 녹색 짙은 녹색 아무도 놀러 오지 않는 방 ​ 고장난 인형이 캄캄 뒤척이다 잠든 방은 어여쁜 분홍색, 좁다란 창에 묶여 휘늘어진 어둠의 리본처럼 ​ 혼자서 가만히 색칠하는 소녀 ​ 다행이다 소녀라서 이대로 잠시 빨갛게 웃을 수 있었어 ​ ​ ​ ​ ​ 박소란 시집 / 심장에 가까운 말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