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치명적 실수 / 나태주

그림 / 김두엽 치명적 실수 / 나태주 오늘 나의 치명적 실수는 너를 다시 만나고 그만 너를 좋아해버렸다는 것이다 네 앞에서 나는 무한히 작아지고 부드러워지고 끝없이 낮아지고 끝내는 사라져버리는 그 무엇이다 네 앞에서 나는 이슬이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기도 한다 보아라, 두둥실 하늘에 배를 깔고 떠가는 저기 저 흰 구름! *시집 / 나태주 대표 시선집

배웅 / 박송이

그림 / 정현영 ​ ​ ​ ​ ​ 배웅 / 박송이​ ​ ​ ​ ​ 이 세상에 없는 당신들에게 구걸하면서 헛바퀴로 돌바퀴로 구르던 시절들아 쇠창살에 갇힌 개처럼 짓다가 컹컹컹 식어가던 밥그릇들아 막 구워낸 프린터 복사지처럼 아주 잠깐 달궈졌던 몸뚱어리들아 밥 한 술 떠 먹여 주지 않던 길고 가벼운 절망들아 빠진 머리카락들아 ​ 안녕히 가세요 ​ ​ ​ ​ ​ *지성의 상상 미네르바 (2023봄호) ​ ​ ​ ​ ​ ​ ​

마지막 시선 / 이현경

그림 / 송미정 마지막 시선 / 이현경 한 사람이 떠났다 같이 보았던 청잣빛 하늘이 마지막 시선이 될 줄이야 별만큼 먼 외로움에 떠난 자리가 아프다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영문도 모르고 이별의 점선이 그어진 모서리에 내려앉는다 그리움은 증발되지 못해 쌓여만 가고 벌레 먹은 잎마다 아픔이 스며있듯이 구멍난 가슴에는 이별의 통증이 고여 있다 하늘을 이고 내려온 잠자리 날개의 고운 빛깔처럼 소용돌이치던 아픔이 다시 수평으로 나란히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 이현경 시집 / 허밍은 인화되지 않는다

강물 / 천상병

그림 / 김미자 강물 /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시집 / 한국인이 좋아하는 명시 100선

천변 아이 / 박준

​ ​ ​ ​ ​ 천변 아이 / 박준 ​ 게들은 내장부터 차가워진다 마을에서는 잡은 게를 바로 먹지 않고 맑은 물에 가둬 먹이를 주어가며 닷새며 열흘을 더 길러 살을 불린다 아이는 심부름길에 몰래 게를 꺼내 강물에 풀어준다 찬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에 가는 한밤에도 낮에 마주친 게들이 떠올라 한두 마리 더 집어 들고 강으로 간다 ​ ​ ​ ​ ​ 박준 시집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 있겠습니다 ​ ​ ​ ​ ​ ​

첫사랑 / 괴테

그림 / 박인호 ​ ​ ​ ​ ​ 첫사랑 / 괴테 ​ ​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날 그 첫사랑의 날을.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시절의 그 사랑스러운 때를, ​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키우며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슬픔에 잃어버린 행복을 슬퍼하고 있으니 아, 누가 돌봐주랴 그 아름다운 나날 첫사랑 그 즐거운 때를. ​ ​ ​ ​ ​ 시집 /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시 100선 ​ ​ ​ ​ ​

어느 개인 날 / 이어령

그림 / 박은영 어느 개인 날 / 이어령 태양은 혼자의 힘으로 빛나는 것은 아니다. 비나 구름 그리고 어둠과 함께 있을 때 빛은 비로소 빛이 된다. 사막의 모래알을 비출 때 태양은 저주지만 풀잎 이슬 위로 쏟아지면 축복이다. 태양이 이슬에 젖는 순간마다 태양빛은 새로워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밤을 주신 것이 아니라 밤을 통해 새벽의 빛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홍수를 주신 것이 아니라 홍수로 인해 아름다운 무지개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하여 아름다워지는 생명을 주신 것이다. 태양은 흑점의 어둠이 있어 빛나는 것이다. 이어령 시집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당신의 여백은 침묵이 아니다 / 조은설

작품 / 김명희 당신의 여백은 침묵이 아니다 / 조은설 당신의 여백은 나에게 참 많은 말을 한다 모서리에 앉은 나를 하염없이 귀 기울이게 하지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여백 달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마가 환하다 가난한 영혼이 잠시 쉬어가는 당신의 뜨락 새벽 별들이 까치발로 걸어와 발치에 눕는다 내 간절함의 무게를 끌고 웜홀을 통과하던 기도 소리가 잠시 허리를 펴는 시간 허공의 질긴 목마름을 건너가고 있다 당신에게 가는 길 *웜홀 ; 블랙홀과 화이트홀로 연결된 우주 내의 통로 *출처 / 지성의 상상 미네르바 (2023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