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꽃들 내 곁에 와서 눕다 / 김영자

그림 / 손정희 ​ ​ ​ ​ 꽃들 내 곁에 와서 눕다 / 김영자 ​ ​ ​ ​ 투명한 것을 보면 온몸에 전율이 인다 하늘, 시, 꽃, 꽃을 보면 모두 입술에 대어 보고 싶다 의미 없이 건네주던 그의 사랑 하롱하롱 잎이지는 꽃이었을까 불투명한 속에 함몰되는 두 눈 욕망과 질투심과 시기에 눈알을 굴리며 상처가 괴어 아픈 흔적을 남긴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덧나면 살들은 투명해지는 것인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추한 음부를 내보이는 꽃들 내 곁에 와서 눕다. ​ ​ ​ ​ 김영자 시집 / 문은 조금 열려 있다 ​ ​ ​ ​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만정리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문예창작과 석사 과정 졸업 1991년 김경린 선생 추천, 월간 으로 등단 1993년 2000년 2014년 를 내다 ​ ​ ​ ..

나태주 / 좋은 약

© olga_kononenko, 출처 Unsplash 나태주 / 좋은 약 큰 병을 얻어 중환자실에 널부러져 있을 때 아버지 절룩거리는 두 다리로 지팡이 짚고 어렵사리 면회 오시어 한 말씀, 하시었다 얘야, 너는 어려서부터 몸은 약했지만 독한 아이였다 네 독한 마음으로 부디 병을 이기고 나오너라 세상은 아직도 징글징글하도록 좋은 곳이란다 아버지 말씀이 약이 되었다 두 번째 말씀이 더욱 좋은 약이 되었다 나태주 시집 /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 schluditsch, 출처 Unsplash

바다를 굽다 / 조은설

© ainikolov, 출처 Unsplash ​ ​ ​ ​ ​ 바다를 굽다 / 조은설​ -고등어​ ​ ​ ​ 한 토막 바다를 잘라 석쇠 위에 올린다 ​ 서슬이 시퍼런 칼날 같은 등줄기, 파도를 휘감아 매우 치던 단단하고 날렵한 몸매 이젠 누군가의 재물로 누워 있다 ​ 미쳐 감지 못한 눈에 장엄한 일몰에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산호초의 꽃그늘도 어둠 속에 저물었다 ​ 먼바다에서부터 서서히 귀가 열려 수심 깊은 계곡에서 들려오는 혹동고래의 낮은 휘파람 소리 ​ 나는 지금 수평선 한 줄 당겨와 빨랫줄을 매고 소금기 묻은 시간을 탁탁 털어 말린 후 바다 한 토막, 그 고소한 여유를 굽고 있다 ​ ​ ​ ​ ​ ​ ​ ​ ​ ​​ ​

나룻배와 행인 / 한용훈

나룻배와 행인 / 한용훈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 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새벽에 생각하다 / 천양희

그림 / 김남채 ​ ​ ​ ​ ​ ​ 새벽에 생각하다 / 천양희 ​ ​ ​ ​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노트르담의 성당 종탑에 새겨진 '운명'이라는 희랍어를 보고 「노트릍담의 꼽추」를 썼다는 빅토르 위고가 생각나고 연인에게 달려가며 빨리 가고 싶어 30분마다 마부에게 팁을 주었다는 발자크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인간의 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가 생각나고 너무 외로워서 자신의 얼굴 그리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는 고흐의 자화상이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어둠을 말하는 자만이 진실을 말한다던 파울 첼란이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소리 한 점 없는 침묵도 잡다한 소음도 훌륭한 음악이라고 한 존 케이지가 생각나고 소유를 자유로 바꾼 디오게네스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 나호열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 나호열 혼자 서지 못함을 알았을 때 그것은 치욕이었다 망원경으로 멀리 희망의 절벽을 내려가기엔 나의 몸은 너무 가늘고 지쳐 있었다 건너가야 할 하루는 건널 수 없는 강보다 더 넓었고 살아야 한다 손에 잡히는 것 아무것이나 잡았다 그래, 지금 이 높다란 붉은 담장 기어 오르는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야 흡혈귀처럼 붙어 있는 이것이 나의 사랑은 아니야 살아온 나날들이 식은땀 잎사귀로 매달려 있지만 저 담장을 넘어가야 한다 당당하게 내 힘으로 서게 될 때까지 사막까지라도 가야만 한다 - 태어난 곳을 그리워하면서도 더 멀리 달아나는 생명의 원심력 - 나호열 시집 / 바람과 놀다

내 몸에 자석이 있다 / 박찬세

그림 / 신종섭 ​ ​ ​ ​ ​ 내 몸에 자석이 있다 / 박찬세 ​ ​ 정신을 놓는 날이면 어김없이 내 침대 위다 여기가 어디지에서 어떻게 왔지로 뒤척이는 때이다 기억이 어항 밖으로 뛰쳐나온 뱀장어처럼 꿈틀대는 때이다 그때마다 내 몸에 자석이 있는 건 아닌지 짐짓 심각해져 보는 것인데 가끔 빗장 걸린 내 가슴이 활짝 열릴 때면 내가 키운 날짐승들이 무거운 날갯짓으로 이곳저곳 나를 부리고 다니다가 너무 많이 뱉어버린 말들을 물고 새들은 날아가고 내가 한껏 새처럼 가벼워지면 집이 풍기는 자장을 읽고 척하고 붙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 몸에 자석이 있다 생각하니 의문이 풀린다 공중화장실 둘째 칸만 가는 것이나 단골 식당 메뉴판 아래만 앉는 것이나 서점 시집 코노에만 머무는 것이나 쇠막대에 자석을..

허물 가진 것이 나는 좋다 / 이병일

​ 허물 가진 것이 나는 좋다 / 이병일 ​ ​ ​ ​ 우리는 허물 가진 것들을 보면 참, 독해 끔찍해 무서워 사막에 그슬린 돌덩이 같은 말을 한다 나는 허물 가진 것이 좋다 허물을 먹지 않고 사는 목숨은 없다 가재, 뱀, 누에, 매미 벗는 몸을 갖기 위해 끈끈한 허물을 가진다 숨을 갖기 위해 벗는다 몸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정말이지, 절망도 가둘 몸집을 가졌구나 허물 벗는데 여생을 모두 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벗어도 벗겨내도 벗지 못한 허물이 있듯 히말라야 어느 고승은 정신이 허물이라고 했다 아하, 그렇다면 죽음도 허물이다 반 고흐, 칭기즈칸, 도스토예프스키 비석 뒤의 이야기로 반짝인다 한낱 이야기 앞에서 내가 공하게 믿어온 것들이 깨진다 다음이라는 것이 없는 몸들, 허물만 믿는다 ​ 계간 202..

죽순 / 이병일

© diamondshot, 출처 Unsplash 죽순 / 이병일 수상하다, 습한 바람이 부는 저 대밭의 항문 대롱이 길고 굵은 놈일수록 순을 크게 뽑아 올린다 깊숙이 박혀있던 뿌리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푸른 힘을 밀어내고 있다 댓잎이 쌓여있는 아랫도리마다 축축이 젖어 뾰죽 튀어나온 수만의 촉이 가볍게 머리 내밀고 뿌리는 스위치를 올릴 것이다 난, 어디로부터 나온 몸일까? 대나무 숲, 황소자리에서 쌍둥이자리로 넘어가는 초여름이다 땅속에서는 어둠 을 틈타 안테나를 내밀 것이다 난 초록의 빛을 품고 달빛 고운 하늘에 뛰어오를 것이다 대나무 줄기가 서로 부딪쳐 원시의 소리를 내는 아침, 날이 더워질수록 물빛 속살을 적시며 얕은 잠을 자고 있었던가 초승달이 보름달을 향해 갈수록, 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하늘..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 / 김소연

그림 / 김현숙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 / 김소연 살구나무 아래 농익은 살구가 떨어져 뒹굴듯이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너무 많은 질문들이 도착해 있다 다른 꽃이 피었던 자리에서 피는 꽃 다른 사람이 죽었던 자리에서 사는 한가족 몇 사람을 더 견디려고 몇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 같은 사람을 나누어 가진 적이 있다 같은 슬픔을 자주 그리워한다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마다 나를 당신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지난 여인들이 자꾸 나타나 자기 이야기를 겹쳐 쓰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 되어 간다 당신은 알라의 얼굴에서 예수의 표정이 묻어나는 걸 보았다고 했다 내 걸음걸이에서 이제는 당신이 묻어 나오는 걸 아느냐고 당신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는 두 개의 바다가 만나는 해안에 도착했다 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