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벽 / 추성은(202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 ​ ​ ​ 벽 / 추성은 (202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 ​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 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

명시 2024.01.03 11

감나무와 어머니

감나무와 어머니 이 효 당신과 함께 심었습니다 손가락만 한 감나무 돌짝밭 손끝이 닳도록 함께 땅을 파내려 갔습니다 주님은 햇살을 끌어다 주시고 가족은 새벽을 밀었습니다 오늘, 그 감을 따야 하는데 당신은 가을과 함께 먼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식탁 위 접시에 올려진 감 하나 차마 입으로 깨물지 못합니다 한평생 자식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헌신을 온몸으로 땅에 쓰고 가르치신 어머니 그렁한 내 눈은 붉은 감빛이 되었습니다 *오랜동안 블로그를 비웠습니다. 늦은 가을에 어머님을 보내고 다시 마음을 추슬러봅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2023년 마지막 겨울입니다. 블친님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자작시 2023.12.17 15

너 명상 속에 들어와 봐 / 노창수

그림 / 김한겸 ​ ​ ​ ​ ​ ​ 너 명상 속에 들어와 봐 / 노창수 ​ ​ ​ 요즘 근황 좀 물어봐 노을 속 가랑잎이지 브람스처럼 젖으며 도톰히 낳고 지나치다 잎 떨궈 사라질 무념 투명히도 부르지 ​ 잠 깨워 손 잡으면 공수거로 헤어지지 비듬의 생애 편린들 흔들며 털어내며 눈 감고 절기 외우다 늙은 팔로 저어가지 ​ 늦은 밤 침잠하듯 공수래도 얻게 되는 시든 다발 내다버리듯 가죽을 비우고 나서 정양수 빌린 미명을 촉루처럼 닦아 담지 ​ ​ ​ ​ ​ 노창수 시인 / 현대 시학 등단,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1979) ​ ​ 2023 한국시학 가을호 수록 ​ ​ ​ ​ ​ ​ ​​ ​ ​​ ​

명시 2023.09.17 23

초가을, 서쪽 / 김용택

그림 / 김한겸 ​ ​ ​ ​ ​ ​ 초가을, 서쪽 / 김용택 ​ ​ ​ 산 아래 동네가 참 좋습니다 벼 익은 논에 해 지는 모습도 그렇고 강가에 풀색도 참 곱습니다 나는 지금 해 지는 초가을 소슬바람 부는 산 아래 서 있답니다 산 아래에서 산 보며 두 손 편하게 내려놓고 맘이 이리 소슬하네요 초가을에는 지는 햇살들이 발광하는 서쪽이 좋습니다 ​ ​ ​ ​ 김용택 시집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나요 ​ ​ ​ ​ ​

명시 2023.09.15 4

선인장 / 박경희

© enginakyurt, 출처 Unsplash 선인장 / 박경희 살기 위해서다 푸른 잎이 가시로 변한 것도 몸통만 둥글게 부풀리는 것도 살기 위해서다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이고 긴 시간 버티어 본 적 있는가 생명의 푸른 기운 그것 지키려고 사방에 가시를 둔 거다 때로는 가시가 나를 찔러도 두껍게 풀은 옷 입고 버티는 거다 언제나 붉은 꽃 피우려고 견디는 거다. * 2023 월간 신문예 (120호)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명시 2023.09.14 2

정오의 언덕 / 서정주

© staceyhfc10, 출처 Unsplash 정오의 언덕 / 서정주 보지마라, 너 눈물어린 눈으로는... 소란한 홍소(哄笑)의 정오천심(正午天心)에 다붙은 내 입술의 피묻은 입맞춤과 무한 욕망의 그윽한 이 전율을... 아 ~~ 어찌 참을것이냐! 슬픈 이는 모두 파촉(巴蜀)으로 갔어도 윙윙거리는 불벌의 떼를 꿀과 함께 나는 가슴으로 먹었노라 시악시야! 나는 아름답구나 내 살결은 수피(樹皮)의 검은 빛 황금 태양을 머리에 달고 몰약(沒藥) 사향(麝香)의 훈훈한 이 꽃자리 내 숫사슴의 춤추며 뛰어가자 웃음 웃는 짐승, 짐승 속으로. 서정주 시집 / 화사집 *서정주 시인은 "지귀도" 라는 섬에 머물면서 방목된 사슴들을 보고 쓴 시다. *사슴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 욕구인 "성욕"과 "공격성"을 잘 드러낸 작품..

명시 2023.09.12 2

유리창 / 정지용

유리창 /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 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와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 갔구나 ! *정지용 연구 / 이승철 자식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난 서글픈 심정을 표현한 시다. 싸늘한 시신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죽음의 느낌과 자식 때문에 생긴 삶의 허전하고 막막한 공백감을 유리창의 차가운 촉각적 감각을 통해 아주 선명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이런 것을 촉각적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명시 2023.09.11 4

식탁 둘레 / 감태준

그림 / 서귀자 ​ ​ ​ ​ ​ 식탁 둘레 / 감태준 ​ ​ ​ 식탁 둘레에 모여 있는 의자들을 본다. 다들 조용하다. 두 딸은 시집가고 아내는 늦은 아들을 기다리다 방에 들고, 나는 슬그머니 아내의 의자에 가서 앉아 본다. ​ 아들 옆 이 자리에서 아내는 밥 먹는 식구들을 둘러보았으리. 아침상에 나오지 않는 두 딸의 의자를 보고 아픈 젖을 한 번 더 떼기로 하였으리. ​ 그런 날이 또 올 것이다. 그때에도 아내는 또 한 젖을 떼며 의자 구석구석을 닦고 문질러 윤을 내고 있으리. ​ 불을 끄면 식탁 둘레가 더 적막할 것 같다. 불을 끈다, 아내의 얼굴이 꺼지지 않는다. ​ ​ ​ ​ ​ 집 ​ ​ ​ ​​ ​

명시 2023.09.09 2

세잔과 용서 / 박지일

© britishlibrary, 출처 Unsplash ​ ​ ​ ​ ​ 세잔과 용서 / 박지일 ​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세잔과 용석은 호명하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의 인물이었다 나는 세잔을 찾아서 용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반대로 용석을 찾아서 세잔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했다 ​ 용석은 빌딩과 빌딩의 틈새를 가늠하는 아이였다 세잔과 용석 몰래 말하려는 바람에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다 (세잔과 용석은 사실 둘이다) ​ 다시, ​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세잔과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 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 세잔은 공기의 얼굴 뒤에 숨어 있는 프리즘이었다 ​ ..

명시 2023.09.07 3

아침의 마음 / 오은

그림 / 김한겸 ​ ​ ​ ​ ​ ​ ​ 아침의 마음 / 오은 ​ ​ ​ ​ 눈을 떠도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세수를 해도 다 씻기는 것은 아니다 ​ 걷고 있다고 해도 꼭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있다고 해도 법석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심장이 뛸 때마다 속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 발끝에 고인 눈물이 굳은살로 박이는 아침 ​ 바깥이 밝다고 안까지 찬란한 것은 아니다 ​ ​ ​ ​ ​ 오은 시집 / 마음의 일 ​ ​ ​ ​ ​ ​

명시 2023.09.06 2

자동 판매기 / 최승호

그림 / 김한겸 ​ ​ ​ ​ ​ ​ 자동 판매기 / 최승호 ​ ​ ​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둘러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 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 다니다 ​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賣春婦(매춘부)라 불러도 되겠다 黃金(황금)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權能(권능)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 그러면 賣淫(매음)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十字架(십자가)를..

명시 2023.09.05 4

꽃들 내 곁에 와서 눕다 / 김영자

그림 / 손정희 ​ ​ ​ ​ 꽃들 내 곁에 와서 눕다 / 김영자 ​ ​ ​ ​ 투명한 것을 보면 온몸에 전율이 인다 하늘, 시, 꽃, 꽃을 보면 모두 입술에 대어 보고 싶다 의미 없이 건네주던 그의 사랑 하롱하롱 잎이지는 꽃이었을까 불투명한 속에 함몰되는 두 눈 욕망과 질투심과 시기에 눈알을 굴리며 상처가 괴어 아픈 흔적을 남긴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덧나면 살들은 투명해지는 것인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추한 음부를 내보이는 꽃들 내 곁에 와서 눕다. ​ ​ ​ ​ 김영자 시집 / 문은 조금 열려 있다 ​ ​ ​ ​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만정리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문예창작과 석사 과정 졸업 1991년 김경린 선생 추천, 월간 으로 등단 1993년 2000년 2014년 를 내다 ​ ​ ​ ..

명시 2023.09.0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