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생명 11

눈물 / 김현승

그림 / 김애자 ​ ​ ​ ​ ​ 눈물 / 김현승​ ​ ​ ​ ​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 김현승 시집 / 가을의 기도 ​ ​ ​ ​ ​ ​​ ​ ​​ ​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그림 / 박명애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입맞춤을 연습해 본 적이 없어 광신도가 춤을 추던 그날 밤 생명이 자궁에 바늘처럼 꽂혔지 아빠라는 단어를 사막에 버린 남자 무표정한 가을이 오고, 혈액형을 쪼아대는 새들 끊어진 전선으로 반복된 하루 딱 한 번의 입맞춤 눈빛이 큰 불을 지핀 거야 모든 삶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 매일 밤, 암막 커튼을 치고 바다로 가는 꿈을 꿔 나쁜 생각들이 골수를 빼먹어 아비도 없는 애를 왜 낳으려고 하니? 이름도 모르는 신에게 아가 울음을 택배로 보낼 수 없잖아 나는 썩지 않는 그림자니까 어느 날, 종소리가 달팽이관을 뚫고 아기 숨소리 깃털이 된다 생명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거래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세상에 두 번째 입맞춤을 알릴 거야 그건 슬픔이 아닌, 정오의 입맞춤 이효 ..

사랑 / 오세영

그림 / 김미혜 사랑 / 오세영 세상사는 일이 무엇이던가 우주는 자연을 기르고, 자연은 생명을 기르고, 생명은 사랑을 기르고, 사랑은 또 우주를 기르나니 저 무심한 바위도 홀로 이끼를 기르지 않던가.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바위가 금 가지 않으려, 깨지지 않으려 버티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억만년 지구를 감싸안고 도는 태양의 사랑이여. 오세영 시화선집 / 바이러스로 침투하는 봄

이별 Der Abschied / 괴테​​

그림 / 윤세호 ​ ​ ​ ​ 이별 Der Abschied / 괴테​ ​ ​ ​ 이별의 말은 입이 아닌 눈으로 하리라. 견디기 어려운 이 쓰라림! 언제나 굳건히 살아왔건만. ​ 달콤한 사랑의 징표도 헤어질 때는 슬픔이 되는 것을. 너의 키스는 차가워지고, 너의 손목도 힘이 없으니. ​ 슬쩍 훔친 키스가 그때는 얼마나 황홀했던지! 이른 봄에 꺾었던 오랑캐꽃이 우리들의 기쁨이었던 것처럼. ​ 너를 위해 다시는 꽃도 장미도 꺾지 않으리. 프란치스카여, 지금은 봄이라지만 나는 쌀쌀한 가을 같구나.​ ​ ​ ​ ​ 괴테 시집 / Johann Wolfgang von Goethe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 ​ ​ ​ ​ ​

소금 성자 / 정일근

낙산해수욕장 ​ ​ ​ ​ ​ 소금 성자 / 정일근 ​ ​ ​ 히말라야 설산 높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물속에 숨어 있는 소금을 받아내는 평생 노역이 있다 소금이 무한량으로 넘치는 세상 소금을 신이 내려주는 생명의 선물로 받아 소금을 순금보다 소중하게 모시며 자신의 당나귀와 평등하게 나눠 먹는 사람이 있다. ​ ​ ​ ​ ​정일근 시집 / 소금 성자 ​ ​ ​ ​

단추 / 이인주

그림 / 최길용 ​ ​ ​ ​ ​ 단추 / 이인주 ​ ​ ​ 단추의 생명은 구멍이다 그 좁고 캄캄한 구멍속으로 흘러들어간 환한 실오라기들이 얼마나 단단한 결속의 언약인지 ​ 구멍이 없는 것들은 모른다 소통이란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것 입술에서 입술로 뚫린 이음줄이 오감을 올려내는 둥근 탄성을 ​ 몸이 열리는 맨 처음의 자리와 마음이 닫히는 맨 끝자리에 단추가 있고 원죄 같은 구멍 속으로 흘러온 역사는 사실 단추의 역사인데 그 풀고 잠그는 형태가 능히 한 서사를 바꾸기도 한다 ​ ​ ​ ​ 시집 / 초중도 ​ ​ ​ ​ 이인주 *2003년 신춘문예 당선 제8회 평사리문학대상 수상, 시집 ​ ​ ​ ​ ​ ​ ​ ​ ​

찬란 / 이병률

그림 / 임 정 순 ​ ​ ​ 찬란 / 이병률 ​ ​ ​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하다 ​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 ​ ​ ​ ​ 시집 /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새 1 / 이 남 우

​심정수 작품 (1) ​ 새 1 / 이 남 우 ​ ​ 들 논 트랙터 지나간 자리에 가지런히 꽂힌 나락 하늘 파란 구름은 눈에 잡히는 아버지 그리고 가슴에 스며오는 바람 이야기 차라리 구분하지 않았으면 내게 서러움이 없을 논두럭 새는 벌레 잡기에 지 생명 걸지만 보는 나 그 날갯짓에 목숨을 걸....... ​ ​ ​ 이남우 시집 : 나무 ​ ​ ​ ​ ​ ​ 심정수 작품 (6)

꽃이 진다면 / 황 은 경

​ ​ 꽃이 진다면 / 황 은 경 ​ 꽃이 진 자리도 아픈가 봐요 계절의 흐름대로 아픈 자리에 다시 피는 다른 꽃 사람의 가슴처럼 아픔이 있어요 ​ 꽃이 진 자리에는 물기조차 머물 새가 없겠지요 이른 아침 거미그물이 받쳐 준 성수 같은 눈물 초록의 들풀이 꿈꾸는 자리에 떨굽니다 ​ 떠남의 의미가 지워진다고 가슴에 담은 사랑이 지워지지 않아요 꽃이 진 자리에 다시 생명이 닿을 때까지 부디, 우리 아프지 말아요. ​ ​ 시집 : 생각의 비늘은 허물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