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구름 16

모자이크 / 박은영

그림 / 최연 모자이크 / 박은영 모자 가정이 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수급비가 끊기자 국밥 한 그릇 사 먹을 돈이 없었다 아홉살 아이는 식탐이 많았다 24시간 행복포차식당에서 두루치기로 일을 하고 눈만 붙였다가 등만 붙였다가 엉덩이만 붙였다가, 부업을 했다 아이가 손톱을 물어뜯을 땐 국밥 먹고 싶다는 말이 나올까봐 야단을 쳤다 반쪽짜리 해를 보며 침을 삼키던 아이는 일찍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찢어진 날들을 붙이면 어떤 계절이 될까 내가 있는 곳은 멀리서 보면 그림이 된다고 했지만 밀린 인형 눈알을 붙이며 가까이 보았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희부옇게 보이는 내일, 아이의 슬픔이 가려지고 조각조각, 조각조각 깍두기 먹는 소리가 들렸다 박은영 시집 /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원룸 / 김 소 연

그림 / 임 노 식 ​ ​ ​ ​ 원룸 / 김 소 연 ​ ​ ​ 창문을 열어두면 앞집 가게 옥외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내 방까지 닿는다 ​ 주워 온 돌멩이에서 한 마을의 지도를 읽는다 밑줄 긋지 않고 한 권 책을 통과한다 ​ 너무 많은 생각에 가만히 골몰하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듣는 느낌이 온다 ​ 꿈이 끝나야 슬그머니 잠에서 빠져나오는 날들 꿈과 생의 틈새에 누워 미워하던 것들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 이야기는 그렇게 내 곁에 왔고 내 곁을 떠나간다 ​ 가만히 있기만 하여도 용서가 구름처럼 흘러간다 내일의 날씨가 되어간다 빈방에 옥수수처럼 누워서 ​ ​ ​ ​ ​ 김소연 시집 / 수학자의 아침 ​ ​ ​ ​

왜목바다 / 박 영 대

그림 / 이 경 선 ​ ​ ​ 왜목바다 / 박 영 대 ​ ​ 푸른끼라고는 없는 저 갯벌 하나 키우기 위해 파도는 얼마나 많은 기저귀를 빨아댔는지 ​ 간간하게 절여진 구름 사이로 나이 든 바다가 힘들어 하는 걸 보면 ​ 뜨고 지는 피곤에 몸져 누운 뼈마디 쑤셔 그렁그렁 붉게 앓고 있다 ​ 삼백예순날 때 맞춰 끼니상 차려주는 아침해를 오늘 하루만 알아주는 생일날 ​ 늙수레한 왜목바다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 ​ ​ ​ *한국현대시인협회 총장 *아태문인협회 지도위원 *한국신문예문학회 자문위원 *서울미래예술협회 수석이사 ​ ​

어머니 / 오 세 영

그림/ 김 계 희 ​ ​ ​ 어머니 / 오 세 영 ​ ​ ​ 나의 일곱 살 적 어머니는 하얀 목련꽃이셨다. 눈부신 봄 한낮 적막하게 빈 집을 지키는, ​ ​ 나의 열네 살 적 어머니는 연분홍 봉선화꽃이셨다. 저무는 여름 하오 울 밑에서 눈물을 적시는, ​ ​ 나의 스물한 살 적 어머니는 노오란 국화꽃이셨다. 어두운 가을 저녁 홀로 등불을 켜 드는, ​ ​ 그녀의 육신을 묻고 돌아선 나의 스물아홉 살, 어머니는 이제 별이고 바람이셨다. 내 이마에 잔잔히 흐르는 흰 구름이셨다. ​ ​ ​ 오세영 시집 / 시는 나에게 살라고 한다 ​ ​ ​

강물로 그리는 새벽 별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강물로 그리는 새벽 별 / 이 효 ​ ​ 새벽 창가에 앉아 푸른 강물에 그림을 그립니다 흔들리는 나뭇잎으로 시를 쓰듯 절재된 마음을 그립니다 ​ 아주 오랜 세월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혼절한 사랑 구름과 눈물방울 비벼서 붉은 나룻배를 그립니다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인연 조용히 떠나보냅니다 ​ 어차피 인생이 내가 그리는 한 점에 그림이라면 이제는 슬픈 강물이 되지 않으렵니다 창가에 앉아있는 소녀는 세월을 삼키고 오늘도 푸른 강물에 마음을 그립니다 ​ ​ 휑한 마음, 새벽 별 하나 안고 홀로 걸어갑니다. ​ ​ ​ ​ 사진 / 청송 주산지

오월을 떠나보내며   / 목 필 균

오월을 떠나보내며 / 목 필 균 다시 돌아오지 못할 또 하나의 오월을 떠나 보내며 향기로웠다 노래하지 못하겠다. 다시 만나지 못할 또 한 번의 오월을 흘려보내며 따뜻했다 말하지 못하겠다. 울타리 장미 짙은 입술로도 손짓하지 못한 그리움 아카시아 흐드러진 향기로도 답하지 못한 사랑 뒤돌아 밟아보지 못한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무심한 구름으로 흘러 5월의 마지막 햇살이 지는 서쪽 하늘을 배웅한다.

새 1 / 이 남 우

​심정수 작품 (1) ​ 새 1 / 이 남 우 ​ ​ 들 논 트랙터 지나간 자리에 가지런히 꽂힌 나락 하늘 파란 구름은 눈에 잡히는 아버지 그리고 가슴에 스며오는 바람 이야기 차라리 구분하지 않았으면 내게 서러움이 없을 논두럭 새는 벌레 잡기에 지 생명 걸지만 보는 나 그 날갯짓에 목숨을 걸....... ​ ​ ​ 이남우 시집 : 나무 ​ ​ ​ ​ ​ ​ 심정수 작품 (6)

벚꽃 엔딩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벚꽃 엔딩 / 이 효 ​ 마음에 몰래 사랑을 품은 게 무슨 죄라고 꽃잎 저리도 붉은가요 지난밤에 봄비 내리더니 흥건히 젖은 마음 붉게 호수에 펼쳐 놓았군요 머물지 못할 사랑이라면 구름으로 나룻배 띄워 소리 없이 떠나시구려 ​ 만개한 벚꽃은 꿈결 같았다. 간밤에 봄비 내리더니 춤추며 떨어지는 꽃잎들~ ​ 단 며칠만의 달콤한 사랑이었지만 내 평생 살아가는 동안 뜨거운 사랑 마음에 한 장 걸어놓고 살아가렵니다. ​

배를 매며 / 장 석 남

그림 : 김 복 동 ​ ​ ​ 배를 매며 / 장 석 남 ​ ​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개 되는 것 ​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 ​ 시집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사랑이 시작되는 과정을 배를 매는 것에 빗대여서 표현한 작품이다. ​ ​ *장석남 약력 19..

조연 꼬리표

조연 꼬리표 / 이 효 ​ 파란 하늘이 내려온다 구름이 땅 같고 땅이 구름 같구나 무대 위 서서히 춤추는 무희 속은 울고 있다 외다리 무희 아픔 골 깊다 ​ 무대 앞 우뚝 솟은 산 누런 잎에 녹아내린 세월 전쟁터에서 승리한 적장은 꽃다발 던진다 피 묻은 겉옷 흰옷 갈아입는다 ​ 내 안에 포로는 속삭인다 새벽이 오기 전에 떠나자 양철 같은 둥근 모자 쓰고 깃털을 단다 적지를 탈출하는 풀 피리 소리 무음으로 떤다 ​ 파란 하늘에서 양발로 자유롭게 춤추는 그날까지 조연 꼬리표 하늘에 펄럭인다 춤추는 무희의 눈물 한 방울 가을 산 활활 태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