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바다 16

우주의 그릇 / 이근배

그림 / 심재관 우주의 그릇 / 이근배 하늘이 이보다 높으랴 바다가 이보다 넓으랴 조선 백자 항아리 흰 옷의 백성들 희고 깨끗한 마음 담아 우주의 그릇을 지었구나 어느 천상의 궁궐이 어느 심해의 용궁이 이렇듯 웅대장엄하랴 꺼지지 않는 백의의 혼불이 해와 달보다 더 밝구나 오랜 이 땅의 역사 여기 불멸의 탑으로 서 있나니 우주 안에 또 하나의 우주이어라 2023년 1월 신문예 초대시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역임 *경향, 서울, 조선, 동아, 한국일보 신춘문예 5관왕 *시집 외 전지연 작품

문학이야기/명시 2023.01.01 (37)

다리 / 정복여

그림 / 장순업 ​ ​ 다리 / 정복여 ​ ​ 강물 이라든지 꽃잎 이라든지 연애 그렇게 흘러가는 것들을 애써 붙들어보면 앞자락에 단추 같은 것이 보인다 가는 끝을 말아쥐고 부여잡은 둥긂 그 표면장력이 불끈 맺어놓은 설움에 꽁꽁 달아맨 염원의 실밥 ​ 바다로나 흙으로나 기억으로 가다 잠깐 여며보는 그냥...... 지금...... 뭐...... 그런 옷자락들 ​ 거기 흠뻑 발 젖은 안간힘의 다리가 보인다 ​ ​ ​ ​ 정복여 시집 / 체크무늬 남자 ​ ​ ​ ​ ​

봄비 / 박형준​

그림 / 정미라 ​ ​ ​​ 봄비 / 박형준 ​ ​ ​ 당신은 사는 것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내게는 그 바닥을 받쳐줄 사랑이 부족했다. 봄비가 내리는데, 당신과 닭백숙을 만들어 먹던 겨울이 생각난다. 나를 위해 닭의 내장 안에 쌀을 넣고 꿰매던 모습, 나의 빈자리 한 땀 한 땀 깁는 당신의 서툰 바느질, 그 겨울 저녁 후후 불어먹던 실 달린 닭백숙 ​ ​ ​ ​ 박형준 시집 /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 ​ 박형준 1991년 산춘문예 당선, 미당 문학상 수상 시집 외 9권 ​ ​ ​ ​

깊은 숲 / 강윤후

그림 / 권 선 희 ​ ​ ​ ​ ​ 깊은 숲 / 강윤후 ​ ​ ​ 나무들이 울창한 생각 끝에 어두워진다 김 서린 거울을 닦듯 나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걷으며 나아간다 깊이 들어갈수록 숲은 등을 내보이며 ​ 멀어지기만 한다 저 너머에 내가 길을 잃고서야 닿을 수 있는 집이라도 한 채 숨어 있다는 말인가 문 열면 바다로 통하는 집을 저 숲은 품에 안고 성큼 성큼 앞서 가는 것인가 마른 잎이 힘 다한 바람을 슬며시 ​ 내려놓는다 길 잃은 마음이 숲에 들어 더 깊은 숲을 본다 ​ ​ ​ ​ 시집 / 다시 쓸쓸한 날에 ​ ​ ​ ​

깊은 숲 / 강 윤 후

그림 / 강 은 영 ​ ​ ​ 깊은 숲 / 강 윤 후 ​ ​ 나무들이 울창한 생각 끝에 어두워진다 김 서린 거울을 닦듯 나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걷으며 나아간다 깊이 들어갈수록 숲은 등을 내보이며 ​ 멀어지기만 한다 저 너머에 내가 길을 잃고서야 닿을 수 있는 집이라도 한 채 숨어 있다는 말인가 문 열면 바다로 통하는 집을 저 숲은 품에 안고 성큼 성큼 앞서 가는 것인가 마른 잎이 힘 다한 바람을 슬며시 ​ 내려놓는다 길 잃은 마음이 숲에 들어 더 깊은 숲을 본다 ​ ​ ​ ​ *출생 : 1962, 서울 *학력 :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력 : 우송공업대학 (문예창작과조교수) ​ ​ ​ ​

찬란 / 이병률

그림 / 임 정 순 ​ ​ ​ 찬란 / 이병률 ​ ​ ​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하다 ​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 ​ ​ ​ ​ 시집 /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블루 / 나 호 열

그림 / 박 상 희 ​ ​ ​ 블루 / 나 호 열 ​ ​ ​ 투명한데 속이 보이지 않는 풍덩 빠지면 쪽물 들 것 같은데 물들지 않는, ​ 가슴이 넓은 너에게로 가면 나는 새가 되고 유유히 헤엄치는 인어가 되지 푸를 것 같은데 푸르지 않는 눈물처럼 너는 나의 하늘 너는 나의 바다 ​ 그저 푸름이지 푸름이지 되뇌면 푸릉푸릉 싹이 돋을 것 같은 ​ ​ 시집 /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바닷가에 대하여 / 정 호 승

그림 / 이 효 경 ​ ​ ​ 바닷가에 대하여 / 정 호 승 ​ ​ ​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

추암에서 / 나 호 열

​ ​ ​ ​ 추암에서 / 나 호 열 ​ ​ ​ 바다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공손해진다. 어떤 거만함도, 위세도 멀리서 달려와 발 밑에 부서지는 포말에 불과한 것임을 모르는 채 깨닫게 된다. 바다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공손해진다. 보지 않으려해도 볼 수 밖에 없는 수평선을 보며 위태로운 줄타기의 광대가 되는 자신을 떠올리거나 수평선의 끝을 잡고 줄넘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무의식적으로 손을 길게 내밀어 고무줄처럼 수평선을 끌어당기고 싶다면 아직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좀 더 살아야하는 것이다. ​ ​ ​ 그림 / 김 경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