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푸른언덕 19

나트랑 가다 / 이효

그림 / Galina Lintz 나트랑 가다 / 이효 구름은 여행자의 꿈을 싣고비행기 의자는 고단한 하루를 눕힌다 바다를 건너온 지친 마음은잠시 유실물 보관소에 맡긴다 오후 3시로 기운 낯선 풍경코를 세운 비행장의 이국적 내음 저녁을 먹고 찾아간 베트남 재래시장 유순한 망고는 노란 겉옷을 벗고 나트랑의 향기를 움켜잡는 바나나는 손을 펼쳐 악수를 청한다 잡을까 말까하기야 인생 노랗게 익었으면 그만이지 모국어는 타국에서도 귓전에 꽂힌다“천 원이요” “천 원” 호주머니에서 꺼낸 구겨진 화폐퇴계 이황의 얼굴이 슬픈 저녁이다

수국 편지 마당 / 이 효

그림/ 김태현수국 편지 마당 / 이효마당 한편에 아침을 베어 물고 아버지 유서처럼 정원에 한가득 핀 수국 직립의 슬픔과 마주한 자식들 엄니 업고 절벽의 빗소리 젖은 꽃잎 떨어지는 소리마다 짙어지는 어둠의 경계 혓바닥 마르고 주머니 속 무게 마른 나뭇잎 같아도 샘물처럼 퍼주며 살아라 바람에 날리는 수국 편지 맑다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매미 / 이 효

그림 / 조희승​​​매미 / 이 효​​​목이 찢어지게 우는 그늘이 없는 배경벗고 또 벗은 여름은 뜨거운 13평 캄캄한 진흙 속, 날개의 불협화음가난의 살 떨림은 무죄다 임대 아파트를 뚫고 나온 본능날개에 기생하는 대출이자 울음은 뼈가 드러난 7월의 비명고열을 앓는 아스팔트 위, 허물 벗은 죽음 하나 지나가는 사람들 발밑에 매달린 무례한 귀발소리, 숨소리 사라진 무채색이다 ​​​​​​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숲에 서다 / 이 효

​​숲에 서다 / 이 효​​ 이른 아침 숲에 든다 테크론보다 질긴 생명력을 지닌 칡넝쿨 ​오르고 또 올라서 넝쿨 아래 나무들 한 조각의 빛 눅눅해진다 푸른 투망에 갇힌 나무들 ​힘 있는 자여 절망의 잎 덮지 말아라 햇살은 누군가에게 지푸라기 같은 양식이다 ​숲에서 나오는 길 내 신발 밑에도 칡꽃이 가득 묻었다 ​​숲은 내게 살아있는 경전이다​​​이효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내려 놓는다 / 이영광

내려 놓는다 / 이영광 역도 선수는 든다 비장하고 괴로운 얼굴로 숨을 끊고일단은 들어야 하지만 불끈 들어올린 다음 부들부들 부동자세로 버티는 건 선수에게도 힘든 일이지만 희한하게 힘이 남아돌아도 절대로 더 버티는 법이 없다 모든 역도 선수들은 현명하다내려놓는다 제 몸의 몇배나 되는 무게를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텅! 그것 참 후련하게 잘 내려놓는다 저렇게 환한 얼굴로이영광 시인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98년 신인문학상 "빙의" 당선2003년 첫 시집

베이비박스 / 이효

​베이비박스 창고 바닥에 죽어있는 새 한 마리 출산 기록은 숲에 있지만 출생 신고는 나무에 없다 유령이 된 새, 텅 빈 베이비박스 창문 밖의 모진 말들은 쪼글거린다 비를 맞고 날개를 접었나 봐, 굶어 죽은 거야 죽은 아기새 주위로 작은 벌레들이 조문을 온다 작은 종이 상자에 넣어 묻어 주려고 새의 날개를 드는 순간 구더기가 바글거린다 여린 살을 파고드는 고통, 어제와 오늘이 뜯겼다 외면과 무관심의 순간, 살점은 제물이 된 거야 다시는 푸른 숲으로 돌아갈 수 없는 죽음에 이르러 알게 된 세상 불온한 도시에서 불온한 사랑이 미등록된 출생신고 죄책감마저도 씹어 먹은 도시의 슬픔들 말문을 닫은 모진 에미를 대신해 7월의 하늘은 수문을 연다 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네 이름은 아직 붉다

강진고을 (강진 신문) 네 이름은 아직 붉다 / 이 효 동백, 그 이름으로 붉게 피는 말숨결이 꽃잎 같은 집뒤뜰엔 백 년 묵은 동백나무 붉은 침묵으로 피었다 짧고도 깊은숨,모두를 품고 떨어지는 꽃그날 너를 위해 목을 매었던 순간도내겐 시 한 줄 강진의 바람이 불 때마다나의 입술을 조용히 불러다오사랑이었다고 그것이 조국이었다고 붉게 피는 말들은 쓰러지지 않는 붉은 네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