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미혹 (迷惑) / 강해림

그림 / 정경숙 ​ ​ ​ ​ ​ 미혹 (迷惑) / 강해림 ​ ​ ​​ 꼬리를 잘리고도 달아나는 붉은 문장이었거나 , 미혹 迷惑 의 슬픈 올가미였거나 , 천형을 화관처럼 머리에 쓴 ​ 나는 아홉 번 죽었다가 열 번 다시 태어났다 ​ 나의 내면은 늘 에로틱한 상상으로 뜨겁지 어떤 날은 물과 불로 , 또 어떤 날은 빛과 어둠으로 ​ 서로 체위를 바꿔가며 들끓는 , 이상한 가역반응에 사로잡힌 발칙한 언어로 스스로 미끼가 되었지 ​ 저울 위의 고깃덩이처럼 어디가 입이고 항문인지 , 금기와 배반의 이 미지만 괄약근처럼 오므렸다 펼쳤다 하는 ​ 나는 한 마리 유혈목이 , 금단의 땅에서 쫓겨난 이후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지의 첫 문장이다 ​ 고통과 황홀은 한 종족이었던 것 불의 혓바닥에 감겨 , 불의 고문을 견 딘..

눈물 / 김현승

그림 / 김애자 ​ ​ ​ ​ ​ 눈물 / 김현승​ ​ ​ ​ ​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 김현승 시집 / 가을의 기도 ​ ​ ​ ​ ​ ​​ ​ ​​ ​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이원

그림 / 신명숙​ ​ ​ ​ ​ ​ ​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이원 ​ ​ 7cm의 하이힐 위에 발을 얹고 ​ 얼음 조각에서 녹고 있는 북극곰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불이 붙여질 생일 초처럼 고독하다 케이크 옆에 붙어온 프라스틱 칼처럼 한 나무에 생겨난 잎들만 아는 시차처럼 고독하다 ​ 식탁 유리와 컵이 부딪치는 소리 ​ 죽음이 흔들어 깨울 때 매일매일 척추를 세우며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텅 빈 영화상영관처럼 파도 쪽으로 놓인 해변의 의자처럼 아무데나 펼쳐지는 책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오늘의 햇빛과 함께 문의 반목처럼 신발의 번복처럼 번지는 물처럼 ​ 우리는 고독하다 ​ 손바닥만 한 개의 목줄을 매고 모든 길에 이름을 붙이고 숫자가 매겨진 상자 안에서 천 개가 넘는 전..

사랑은 / 박수진

그림 / 이경주 ​ ​ ​ ​ ​ 사랑은 / 박수진​ ​ ​ ​ 사랑은 짐을 들어 주는 게 아니라 마음을 들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내 마음에 등불이 켜지는 거 어둠 속에 빛이 켜지는 거 겨울에도 72도의 체온 속에 상처를 녹이는 것이다 사랑은 지상에서 아름다운 꽃을 같이 가꾸는 것 선인장 잎에서 가시를 뽑고 꽃이 피게 하는 것이다 내 심장에 산소를 넘치게 하여 지평선 끝까지 뛰게 하는 것이다 ​ ​ ​ ​ ​ 산굼부리에서 사랑을 읽다 / 박수진 ​ ​ ​ ​ ​

책등의 내재율 / 엄세원

그림 / 장소영 책등의 내재율 / 엄세원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끼우뚱 쏟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나는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꽃힌 책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쾌락이거나 그날 기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 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수르는 페이지마다 깊숙이 서려 있다 벽 이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 그들만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둠을 즐기는 안쪽 서늘한 밀착, 이즈음은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에 단어들이 압살되는 상상, 책갈피 속 한 송이 압화..

협착의 헤게모니 / 장서영

그림 / 김종수 협착의 헤게모니 / 장서영 뼈와 뼈 사이가 수상하다 경추의 1번과 5번이 밀착되고 요추에 3번과 4번이 뒤틀렸다 그래서 넓어진 건 통증, 다물어지지 않은 연속성 엉덩이는 의자와 협착하고 마감일은 나와 협착하는데 몸에 담긴 뼈와 말에 담긴 뼈가 서로 어긋나서 삐딱한 시선과 굴절된 자세를 도모한다 책상과 내가 분리되기까지 뼈가 중심이라 생각을 한 번도 못 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키보드 소리는 경쾌하고 새겨진 문장들은 마냥 과장됐다 어긋남은 순간이었다 뒤돌아보면 한쪽으로 치우친 건 언제나 나였고 오로지 솔직한 건 내 안의 그녀였다 움직이는 팔을 따라 마우스 줄을 따라 고이는 불협 예민해진 신경과 굳어진 근육 사이로 아픔이 비집고 들어와 지금 여기가 버겁게 흘러내렸다 무게 중심이 무기력 쪽으로 ..

눈 오는 날 / 이문희

그림 / 김이남 눈 오는 날 / 이문희 논밭들도 누가 더 넓은가 나누기를 멈추었다 도로들도 누가 더 긴지 재보기를 그만 두었다 예쁜 색 자랑하던 지붕들도 뽐내기를 그쳤다 모두가 욕심을 버린 하얗게 눈이 오는 날 은 시각적 이미지를 입체화한 것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되었던 동시다. 먼저 이 시의 공간적 이동은 논밭의 수평적 공간에서 점차 더 높은 도로 위로 이동하고 마침내 수직적 공간인 지붕으로 이동 한다. 넓이 길이 높이로 시적 공간을 입체화 하면서 눈 오는 날의 정경을 관찰자의 시점으로 조명하고 있는 점이 색다르다. *1997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 등단작입니다.

크루아상 / 윤달

© larimegale, 출처 Unsplash ​ ​ ​ 크루아상 / 윤달​ ​ ​ ​ 잠이 오지 않아서 밤을 접고, 접고, 또 접어요 아홉 겹의 어둠이 완성되면 잠시 슬퍼질 차례입니다 ​ 보이지 않는 서쪽의 지평선을 당겨서 깔고 슬퍼질 대로 슬퍼진 어둠을 눕여요 잠시 숨죽일 시간입니다 ​ 납작해진 슬픔을 조각조각 잘라서 돌돌 말아 볼까요 나는 지금 초승달을 만드는 중이에요 ​ 초승달이 뜨면 뱀파이어가 되는 당신을 위해 내 슬픔의 신선도를 지키기 위해 냉장고에 넣어 두기로 해요 ​ 아침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당신과 다르게 아침은 어떻게든 제 시간에 찾아오니까 바람맞을 걱정 따윈 안하기로 해요 ​ 아침이 오면 밤새 숨 죽여준 비밀을 꺼내 볼 시간 이제는 발설해도 괜찮은 악몽 조금은 부풀려도 괜찮은 슬픔 ..

오늘의 날씨 -이별 주의보 / 이문희

그림 / 이종석 오늘의 날씨 -이별 주의보 / 이문희 나 오늘 활짝 펴도 되나요? 매일 죽음을 입고 벗지만 정작 우리는 죽음을 모르죠 그래서 당신과 나 사이엔 기압골의 영향으로 편서풍이 분대요 눈물은 잘 마를 거예요 나는 너무 밝은 게 탈이지만 당신은 언제나 폭풍 같죠 그래서 세상은 폭풍전야예요 그래요 밤새 벼락을 맞거나 국지성 호우에 떠내려 가기도 하겠지만 그깟 피지도 않은 꽃잎이 대수겠어요 우울의 강수량 70퍼센트 연애에 실패할 확률 99.99mm 붉은 칸나가 피었어요 나 오늘 활짝 죽어도 되나요? 시집/ 맨 뒤에 오는 사람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