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73

감나무 / 이재무

그림 / 유영을 ​ ​ ​ ​ ​ ​ 감나무 / 이재무 ​ ​ ​ 감나무 저는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 보는 것이다 ​ ​ ​ ​ ​ *시집 : 청소년, 시와 대화하다 ​ ​ ​ ​ ​ ​ ​ ​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그림 / 홍종구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세월은 또 한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 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 비는 재주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이 초란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인가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 본다 밖에는 바람 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시집 / 청소년, 시와 대화하다

마음 / 김광섭

그림 / 김정수 마음 /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시집 /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 100선

환절기 / 조은영

그림 / 이종석 ​ ​ ​ ​ 환절기 / 조은영 ​ ​ ​ 잠들지 못한 사람들이 수화기를 쥐고 있다 너는 물이 많은 사주를 가졌구나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뿌리째 연결음에 매달린 사람들 생활의 자전 속에 자꾸 넘어지는 마음 밤이 등을 돌려 울고 있는 달을 안고 있다 ​ 주먹을 쥐고 울어도 손아귀는 힘이 없어 마르지 않는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나날 ​ 축축한 손의 질기로 흙을 빚는다 눈물을 담을 수 있는 잔만큼 손끝으로 넓이와 깊이를 만든다 물레의 방향에 끌려가지 않도록 지탱하는 왼손 오른 손가락 끝에 힘을 모은다 ​ 물레가 돈다 원심력을 손끝으로 끌어 올린다 절정에 다다른 기물 자름실은 물레의 반대 방향으로 지나간다 질기가 만든 잔을 가마에 넣는다 ​ 손끝에 힘을 준다 원을 그리며 춤을 춰야지 방향을 바꿔 ..

눈을 감고 깊어지는 날 / 이현경

​ ​ ​ ​ ​ 눈을 감고 깊어지는 날 / 이현경​ ​ ​ 누가 눈동자를 메우고 있나 ​ 몇 걸음 안 되는 곳에서도 자식을 선뜻 알아보지 못한다 ​ 어린 자식들 눈에 언어를 깨우쳐 주던 동공에는 해가 기울고 시간의 물결을 건너가는 동안 한 여인의 삶이 출렁인다 ​ 낮은 물결로 때로는 거친 너울로 삶을 뒤척이던 모든 생애 ​ 기억은 흐릿해지고 눈가에는 자식들이 흥분이 맺혀 있다 ​ 마음이 깊어지는 날 어머니가 차오른다 ​ ​ ​ ​ 이현경 시집 / 허밍은 인화되지 않는다 ​ ​ ​ ​​ ​

소녀 / 박소란

그림 / 신종식 ​ ​ ​ ​ 소녀 / 박소란​ ​ ​ ​ 한쪽 눈알을 잃어버리고도 벙긋 웃는 입 모양을 한 인형 다행이다 인형이라서 ​ 오늘도 말없이 견디고 있다 소녀의 잔잔한 가슴팍에 안겨서 ​ 소녀는 울음을 쏟지 않고 아픈 자국을 보고도 놀라지 않지 슬픔은 유치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 ​ 갈색과 녹색처럼 헷갈리기 쉬운 것 ​ 스케치북 속 흐드러진 풍경은 갈색 철 지난 이불에 파묻혀 앓는 엄마 얼굴은 녹색 짙은 녹색 아무도 놀러 오지 않는 방 ​ 고장난 인형이 캄캄 뒤척이다 잠든 방은 어여쁜 분홍색, 좁다란 창에 묶여 휘늘어진 어둠의 리본처럼 ​ 혼자서 가만히 색칠하는 소녀 ​ 다행이다 소녀라서 이대로 잠시 빨갛게 웃을 수 있었어 ​ ​ ​ ​ ​ 박소란 시집 / 심장에 가까운 말 ​ ​ ​ ​ ​..

미혹 (迷惑) / 강해림

그림 / 정경숙 ​ ​ ​ ​ ​ 미혹 (迷惑) / 강해림 ​ ​ ​​ 꼬리를 잘리고도 달아나는 붉은 문장이었거나 , 미혹 迷惑 의 슬픈 올가미였거나 , 천형을 화관처럼 머리에 쓴 ​ 나는 아홉 번 죽었다가 열 번 다시 태어났다 ​ 나의 내면은 늘 에로틱한 상상으로 뜨겁지 어떤 날은 물과 불로 , 또 어떤 날은 빛과 어둠으로 ​ 서로 체위를 바꿔가며 들끓는 , 이상한 가역반응에 사로잡힌 발칙한 언어로 스스로 미끼가 되었지 ​ 저울 위의 고깃덩이처럼 어디가 입이고 항문인지 , 금기와 배반의 이 미지만 괄약근처럼 오므렸다 펼쳤다 하는 ​ 나는 한 마리 유혈목이 , 금단의 땅에서 쫓겨난 이후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지의 첫 문장이다 ​ 고통과 황홀은 한 종족이었던 것 불의 혓바닥에 감겨 , 불의 고문을 견 딘..

눈물 / 김현승

그림 / 김애자 ​ ​ ​ ​ ​ 눈물 / 김현승​ ​ ​ ​ ​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 김현승 시집 / 가을의 기도 ​ ​ ​ ​ ​ ​​ ​ ​​ ​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이원

그림 / 신명숙​ ​ ​ ​ ​ ​ ​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이원 ​ ​ 7cm의 하이힐 위에 발을 얹고 ​ 얼음 조각에서 녹고 있는 북극곰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불이 붙여질 생일 초처럼 고독하다 케이크 옆에 붙어온 프라스틱 칼처럼 한 나무에 생겨난 잎들만 아는 시차처럼 고독하다 ​ 식탁 유리와 컵이 부딪치는 소리 ​ 죽음이 흔들어 깨울 때 매일매일 척추를 세우며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텅 빈 영화상영관처럼 파도 쪽으로 놓인 해변의 의자처럼 아무데나 펼쳐지는 책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오늘의 햇빛과 함께 문의 반목처럼 신발의 번복처럼 번지는 물처럼 ​ 우리는 고독하다 ​ 손바닥만 한 개의 목줄을 매고 모든 길에 이름을 붙이고 숫자가 매겨진 상자 안에서 천 개가 넘는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