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신명숙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이원
7cm의 하이힐 위에 발을 얹고
얼음 조각에서 녹고 있는 북극곰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불이 붙여질 생일 초처럼 고독하다
케이크 옆에 붙어온 프라스틱 칼처럼
한 나무에 생겨난 잎들만 아는 시차처럼 고독하다
식탁 유리와 컵이 부딪치는 소리
죽음이 흔들어 깨울 때
매일매일 척추를 세우며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텅 빈 영화상영관처럼
파도 쪽으로 놓인 해변의 의자처럼
아무데나 펼쳐지는 책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오늘의 햇빛과 함께
문의 반목처럼
신발의 번복처럼
번지는 물처럼
우리는 고독하다
손바닥만 한 개의 목줄을 매고
모든 길에 이름을 붙이고
숫자가 매겨진 상자 안에서
천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저장한 휴대폰을 옆에 두고
벽과 나란히 잠드는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꼭 껴안을수록 뼈가 걸리는 당신을 가진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하나의 창에서
인간의 말을 모르면서도
악을 쓰며 우는 신생아처럼
침을 흘리며 엄마를 찾는 노인처럼
물을 마시고
다리를 접고 펼치고
반은 침묵
반은 허공
제 속을 불 지르고 만 새벽 두시 도로처럼 고독하다
열두 살에 죽은 아이의 수목장 나무 앞에 놓인 딸기 우유처럼 고독하다
막힌 문을 향해 뛰어가는 비상구 속 초록 인간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시체를 뜯어 먹는 독수리들과 함께
높은 곳의 바람과 함께
다른 일을 하나로 알아듣는 이상한 경계와 함께
우리는 고독하다
흰 변기가 점령한 지구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변기에 무릎을 갖게 된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펭귄은 지구에서 고독하다
오로지 긴 귀가 머리 위로 솟아 있다
주파수 93.1MHzrk 잡히는 지구는 고독하다
이원 시집 / 사랑은 탄생하라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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