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책등의 내재율 / 엄세원

푸른 언덕 2023. 8. 4. 13:47

 

그림 / 장소영

 

 

 

책등의 내재율 / 엄세원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끼우뚱 쏟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나는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꽃힌 책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쾌락이거나 그날 기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 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수르는 페이지마다 깊숙이 서려 있다

 

벽 이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

그들만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둠을 즐기는 안쪽 서늘한 밀착, 이즈음은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에 단어들이 압살되는 상상,

책갈피 속 한 송이 압화 같은 나는

허름하고 시린 과거이거나 목록이다

 

나는 쏟아진 책을 주워 천천히 넘겨 본다

벽은 참 출출한 비결(秘訣)이다

 

 

 

 

*201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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