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크루아상 / 윤달

푸른 언덕 2023. 7. 31. 14:46

크루아상 / 윤달

잠이 오지 않아서

밤을 접고, 접고, 또 접어요

아홉 겹의 어둠이 완성되면

잠시 슬퍼질 차례입니다

보이지 않는

서쪽의 지평선을 당겨서 깔고

슬퍼질 대로 슬퍼진 어둠을 눕여요

잠시 숨죽일 시간입니다

납작해진 슬픔을 조각조각 잘라서

돌돌 말아 볼까요

나는 지금 초승달을 만드는 중이에요

초승달이 뜨면 뱀파이어가 되는

당신을 위해

내 슬픔의 신선도를 지키기 위해

냉장고에 넣어 두기로 해요

아침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당신과 다르게

아침은 어떻게든 제 시간에 찾아오니까

바람맞을 걱정 따윈 안하기로 해요

아침이 오면

밤새 숨 죽여준 비밀을 꺼내 볼 시간

이제는 발설해도 괜찮은 악몽

조금은 부풀려도 괜찮은 슬픔

오븐에 넣기 전에 주문을 외워야 해요

타지 마라, 타지 마라, 타지 말아라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가지 말아라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오지 말아라

나의 혈관 깊숙이 파고 들어올 당신의 송곳니 앞에

달큰하게 달아오른 나를 눕혀요

어때요, 당신이 보기에도

내가 영락없는 초승달인가요?

<열린 시학> 2020년 여름 호

 

'문학이야기 > 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 오는 날 / 이문희  (3) 2023.08.02
한밤중에 / 나태주  (3) 2023.08.01
오늘의 날씨 -이별 주의보 / 이문희  (3) 2023.07.30
순간 /문정희  (2) 2023.07.28
치명적 실수 / 나태주  (2) 2023.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