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죽순 / 이병일

푸른 언덕 2023. 8. 22.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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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 / 이병일

 

 

 

수상하다, 습한 바람이 부는 저 대밭의 항문

 

대롱이 길고 굵은 놈일수록 순을 크게 뽑아 올린다 깊숙이 박혀있던 뿌리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푸른 힘을 밀어내고 있다 댓잎이 쌓여있는 아랫도리마다

축축이 젖어 뾰죽 튀어나온 수만의 촉이 가볍게 머리 내밀고 뿌리는 스위치를

올릴 것이다

 

난, 어디로부터 나온 몸일까?

 

대나무 숲, 황소자리에서 쌍둥이자리로 넘어가는 초여름이다 땅속에서는 어둠

을 틈타 안테나를 내밀 것이다 난 초록의 빛을 품고 달빛 고운 하늘에 뛰어오를

것이다 대나무 줄기가 서로 부딪쳐 원시의 소리를 내는 아침, 날이 더워질수록

물빛 속살을 적시며 얕은 잠을 자고 있었던가 초승달이 보름달을 향해 갈수록,

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하늘에 닿을 때까지 단전에 힘을 줄 것이다 대나무향

이 하얗게 깔리는 밤, 튀어나온 뿌리 마디마다 젖무덤처럼 불어올라 포개져있는

껍질을 열어젖힐 때, 댓잎에 미끄러진 햇빛이 푸른 옷을 던질 것이다 나는 마침

내 문을 열었다

 

 

 

 

 

이병일 시집 / 옆구리의 발견 <창비, 2012>

 

 

 

 

제목도 참 특이한 시다

이병일 시인의 죽순에는 생체성이 아주 잘 살아있다. 생체성이란 단순한 의인법과 다르다.

대상을 살아있는 몸으로 보고 몸이 갖는 속성을 보다 세밀하게 적극적으로 시에 반영하는 것을 말한다.

이병일 시인은 죽순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생체성을 넣어서 "습한 바람이 부는 저 대밭의 항문"

"날이 더워질수록 빛 속살을 적시며 얕은 잠을 자고 있었던가" 시의 묘미를 잘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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