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허물 가진 것이 나는 좋다 / 이병일

푸른 언덕 2023. 8. 23. 08:37

 


 

 

 

 

 

 

허물 가진 것이 나는 좋다 / 이병일

우리는 허물 가진 것들을 보면

참, 독해

끔찍해

무서워

사막에 그슬린 돌덩이 같은 말을 한다

나는 허물 가진 것이 좋다

허물을 먹지 않고 사는 목숨은 없다

가재, 뱀, 누에, 매미

벗는 몸을 갖기 위해

끈끈한 허물을 가진다

숨을 갖기 위해

벗는다

몸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정말이지, 절망도 가둘 몸집을 가졌구나

허물 벗는데

여생을 모두 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벗어도 벗겨내도 벗지 못한 허물이 있듯

히말라야 어느 고승은 정신이 허물이라고 했다

아하, 그렇다면 죽음도 허물이다

반 고흐, 칭기즈칸, 도스토예프스키

비석 뒤의 이야기로 반짝인다

한낱 이야기 앞에서

내가 공하게 믿어온 것들이 깨진다

다음이라는 것이 없는 몸들, 허물만 믿는다

 

 

 

계간<애지> 2023 가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