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170

지로용지 커피에 빠진 날 / 이 효

그림 / 남궁원 지로용지 커피에 빠진 날 / 이 효 할머니가 내민 지로용지 사기꾼에게 약 같지 않은 약 몇 배나 비싸게 샀다고 목청을 높이는 아버지 이 정도 약도 못 먹을 팔자냐 니그들이 애미 힘든 거 알아주냐 배꼽 잡게 웃겨주냐 사근사근 총각들이 효자지 종일 어깨 주물러주지 온갖 재롱 다 떨어주지 찌글퉁 얼굴 주름 다 펴주지 내 자슥들보다 낫다 뭐든 팔아 주는 게 도리여 할머니 목청 문지방에 걸리고 커피 맹키로 어두워진 얼굴 지로용지가 커피에 빠진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숟가락을 놓다 / 이 효

그림 / 후후 숟가락을 놓다 / 이 효 ​낡은 부엌문 바람이 두들기는데 빈 그릇에 바람 소리 말을 더듬고 장작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둥근 밥상에 수저 두 개 올려놓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굽는다 할머니 나물 팔던 손으로 부엌문 활짝 열어 놓았다 ​ 바람은 잠시 단추를 채우고 나간다 그림자 된 춥고 외로운 사람들 쓰러진 술병처럼 몸이 얼었다 녹는다 산산이 발려진 생선 가시의 잔해들 ​무표정한 가시를 모아 땅에 묻는다 상처 난 것들 위로 첫눈이 내린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부엌에 온기를 넣는 것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詩, 시시한 별 / 이 효

그림 / 허경애 詩, 시시한 별 / 이 효 별을 따다 준다는 남자와 별을 따다 줄 수 없다는 남자가 결혼을 하자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남자를 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별을 따다 줄 수 없다는 남자랑 결혼했다 베개를 함께 베고 자는 남자의 속삭임 별을 따다 주겠다는 남자는 사기꾼이야 세월이 흘러, 여자는 하늘의 별 대신 방구석 개미들을 세기 시작한다 남자가 별을 따다 줄 수 없다면 내가 하늘에 사다리를 놓아야겠지 개미들은 줄 서서 하늘로 올라간다 詩, 시시한 별 한 바구니 신맛을 본 촌스러운 여자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얘야, 고삐를 놓아라

그림 / 이연숙 얘야, 고삐를 놓아라 소들이 풀을 뜯는다 서산에 떨어지는 붉은 혓바닥 소꼬리 끝에서 일렁이는 구름들 붉은 노을에 놀란 소 일 획을 그으며 언덕을 내달린다 소는 아버지의 유일한 재산 소년은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바닥 맨땅에 끌려간다 바지 구멍에 흐르는 핏빛 멀리서 들리는 떨리는 음성 얘야, 고삐를 놓아라 그래야 산다 명퇴, 힘들면 아이들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라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한울*강 / 이 효

그림 / 조 규 석 한울*강 / 이 효 그대가 그리운 날에는 바람 부는 강가에 서서 아득히 먼 산을 바라봅니다 오랜 세월 내 안에 가둬두었던 당신을 떠나보냅니다 그대가 생각나는 날에는 강가에 핀 유채꽃 사이로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봅니다 나뭇잎이 빗물에 씻기듯 마음에서 그대를 떠나보냅니다 인생은 강 건너 보이는 흐린 산 같은 것 푸른 것들이 점점 사라지는 눈물 그대는 먼 산으로 나는 강물로 왔다가 깊이 끌어안고 가는 묵언의 포옹 *한울 / 큰 울타리처럼 사람들을 포근하게 안아주어라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맨발 기차 / 이 효

그림 / 민병각 맨발 기차 / 이 효 동네에 휘어진 기차가 있다 빗물로 녹슨 선로 위에서 아이들은 외발 놀이 가위, 바위, 보 표정 없는 마네킹처럼 넘어가는 해 종착역의 꺼진 불빛은 눈알 빠진 인형 정거장이 사라진 태엽 풀린 기차 멈춰버린 음악, 깨진 유리창 구겨진 몸통은 달리고 싶은데 바퀴는 목발을 짚고 절뚝거린다 해는 떨어졌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맨발로 버티는 기차는 바람이 불어도 떠나는 아이들 목소리 잡지 못한다 철커덩, 청춘이 떠난 차가운 선로 위 여분의 숨결이 쌕쌕거린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신지도 / 이 효

그 림 / 황 순 규 신지도 / 이 효 뜨거운 여름, 섬 하나 두 다리를 오므리고 누운 모습 생명을 품은 여인의 몸 젖가슴 갈라지더니 해가 오른다 얼마나 간절히 소망했던 생명인가 터트린 양수는 남해를 가득 채운다 철썩거리는 분침 소리 새벽 진통을 마치고 고요하다 하늘 자궁문이 열린 자리에는 수만 송이의 동백꽃이 피어오른다 수평선 위 작은 섬 하나 한여름 꿈이 환하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사과를 인쇄하다 / 이 효

그림 / 김옥석 사과를 인쇄하다 / 이 효 주왕산 병풍 아래 사과밭이 엄마 품만하다 대전사 종소리 붉다 가을 찬바람에 어쩌자고 사과는 뒹구는지 노모의 사과, 가득 싣고 서울로 올라온다 접시에 올려놓은 사과 눈 맞춘다 자를까 말까 상처받는 내 모습 같아 깨물지도 자르지도 못하고 가슴에 안고 인쇄를 한다 가을은 퍼렇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이재호 갤러리

항아리 / 이 효

그림 / 김정수 항아리 / 이 효 손길 닿지 않는 대들보에 항아리를 거신 아버지 까막눈 파지 줍는 아저씨 은행에 돈 맡길 줄 몰라 아버지께 당신을 건넨다 아버지 세상 떠나기 전 항아리 속에 꼬깃꼬깃한 돈 아저씨에게 쥐어준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 긴 겨울이 꼬리 잘리고 다시 찾아온 가을 검정 비닐 들고 온 아저씨 홀로 계신 어머니께 두 손 내민다 비닐 속에는 붉게 터져버린 감이 벌겋게 들어앉아 울고 있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