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186

신창 시장, 긴 편지 / 이 효

그림 / 임천 신창 시장, 긴 편지 / 이 효 할멈을 끌고 간다 언제 어디서나 부르면 굴러온 작은 바퀴 이젠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이 없다 오늘은 할망구 생일 밥상에 덜렁 혼자 앉으니 지난 세월 허두 미안혀 울컥 생목 오른다 석탄 같이 타들어간 당신 먼저 하늘로 보낸 것 같아 신창 시장 달달달 돌며 매일 용서를 구한다 천천히 가유 영감 귓전에 들리는 할멈 목소리 화들짝 놀라 뒤돌아 보니 늙은 아이 홀로 긴 편지 끌고 간다 시집 / 도봉열전 (도봉 문화원) *우리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다

벽속의 어둠 / 이 효

그림 / 이경수 벽속의 어둠 / 이 효 흔들리는 나뭇잎이라도 잡고 싶습니다 나뭇잎도 작은 입김에 흔들리는데 아! 하나님 당신의 숨 한 번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하얀 침대 위 어머니 얼음이 되어간다. 태어나서 스스로 가장 무능하게 느껴진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초라함에 울음도 표정을 잃어버린다. 눈물마저 원망스러운데 창문 넘어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 가지 끝 미세한 흔들림이 눈동자를 찌른다. 아니 그 떨림을 잡고 싶었다. 간절한 기도가 눈발로 날린다. 당신의 숨 한 번 불어주시길~~ 오! 나의 어머니

새해가 내려요 / 이 효

그림 / 이 봉 화 새해가 내려요 / 이 효 꿈틀거리는 지난 시간의 내장들 끊어진 소통 위로 눈이 내린다 방전된 몸으로 새해를 넘어온 사람들 아픈 손톱에 첫눈을 발라준다 뾰얀 속살이 차곡 쌓인 달력을 단다 말풍선에 매달란 섬들이 소통하고 유리벽을 타는 용서가 녹아내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가 찰칵 찍어 놓은, 첫눈 오는 날 핸드폰 속에서 풍겨오는 사람 내음 눈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그렁한 눈발로 묻는다 까똑 까똑 까똑 *신문예 1월의 시 / 이 효

고향에 핀 도라지꽃 / 이 효

그림 / 김정수 고향에 핀 도라지꽃 / 이 효 밥상에 오른 도라지나물 고향 생각난다 할머니 장독대 도라지꽃 어린 손녀 잔기침 소리 배를 품은 도라지 속살 달빛으로 달여 주셨지 세월이 흘러 삐걱거리는 구두를 신은 하루 생각나는 고향의 보랏빛 꿈 풍선처럼 부푼 봉오리 두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면 펑하고 터졌지 멀리서 들리는 할머니 목소리 애야, 꽃봉오리 누르지 마라 누군가 아프다 아침 밥상에 도라지나물 고향 생각하면 쌉쏘름하다 이효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그림 / 박명애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입맞춤을 연습해 본 적이 없어 광신도가 춤을 추던 그날 밤 생명이 자궁에 바늘처럼 꽂혔지 아빠라는 단어를 사막에 버린 남자 무표정한 가을이 오고, 혈액형을 쪼아대는 새들 끊어진 전선으로 반복된 하루 딱 한 번의 입맞춤 눈빛이 큰 불을 지핀 거야 모든 삶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 매일 밤, 암막 커튼을 치고 바다로 가는 꿈을 꿔 나쁜 생각들이 골수를 빼먹어 아비도 없는 애를 왜 낳으려고 하니? 이름도 모르는 신에게 아가 울음을 택배로 보낼 수 없잖아 나는 썩지 않는 그림자니까 어느 날, 종소리가 달팽이관을 뚫고 아기 숨소리 깃털이 된다 생명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거래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세상에 두 번째 입맞춤을 알릴 거야 그건 슬픔이 아닌, 정오의 입맞춤 이효 ..

꿈의 방정식 / 이 효

그림 / 성기혁 꿈의 방정식 / 이 효 지게 위 비단 날개 살포시 올라간다 하늘을 날겠다는 소녀는 백 년 전에 하늘길을 묻는다 작대기 끝처럼 불안한 나라 책보따리 가슴에 둘러매고 동해를 건너 낯선 땅에 선다 조국을 잃은 분노의 질주일까 운명처럼 남자를 품은 죄일까 뒷바퀴가 빠져버린 여자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 천둥 번개 하늘이 말리더니 서른세 살, 푸른 날개 현해탄에서 물거품이 된다 날아야지, 날아야지, 여류 비행사의 부서진 꿈 그녀의 절규는 수직으로 다시 오른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지로용지 커피에 빠진 날 / 이 효

그림 / 남궁원 지로용지 커피에 빠진 날 / 이 효 할머니가 내민 지로용지 사기꾼에게 약 같지 않은 약 몇 배나 비싸게 샀다고 목청을 높이는 아버지 이 정도 약도 못 먹을 팔자냐 니그들이 애미 힘든 거 알아주냐 배꼽 잡게 웃겨주냐 사근사근 총각들이 효자지 종일 어깨 주물러주지 온갖 재롱 다 떨어주지 찌글퉁 얼굴 주름 다 펴주지 내 자슥들보다 낫다 뭐든 팔아 주는 게 도리여 할머니 목청 문지방에 걸리고 커피 맹키로 어두워진 얼굴 지로용지가 커피에 빠진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숟가락을 놓다 / 이 효

그림 / 후후 숟가락을 놓다 / 이 효 ​낡은 부엌문 바람이 두들기는데 빈 그릇에 바람 소리 말을 더듬고 장작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둥근 밥상에 수저 두 개 올려놓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굽는다 할머니 나물 팔던 손으로 부엌문 활짝 열어 놓았다 ​ 바람은 잠시 단추를 채우고 나간다 그림자 된 춥고 외로운 사람들 쓰러진 술병처럼 몸이 얼었다 녹는다 산산이 발려진 생선 가시의 잔해들 ​무표정한 가시를 모아 땅에 묻는다 상처 난 것들 위로 첫눈이 내린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부엌에 온기를 넣는 것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詩, 시시한 별 / 이 효

그림 / 허경애 詩, 시시한 별 / 이 효 별을 따다 준다는 남자와 별을 따다 줄 수 없다는 남자가 결혼을 하자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남자를 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별을 따다 줄 수 없다는 남자랑 결혼했다 베개를 함께 베고 자는 남자의 속삭임 별을 따다 주겠다는 남자는 사기꾼이야 세월이 흘러, 여자는 하늘의 별 대신 방구석 개미들을 세기 시작한다 남자가 별을 따다 줄 수 없다면 내가 하늘에 사다리를 놓아야겠지 개미들은 줄 서서 하늘로 올라간다 詩, 시시한 별 한 바구니 신맛을 본 촌스러운 여자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