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과 어머니 / 이효 묵과 어머니 / 이효간병인이 사라진 날 척추가 불안한 어머니 집 딸만 보면 묵을 쑨다 수직 궤도 벗어난 꼬부라진 허리 싱크대에 매달려 추가 된다 끈끈한 묵 나무 주걱으로 세월만큼 휘젓는다 불 줄여라 엄마의 잔소리는 마른 젖 오래 저어라 끈기 있게 살라는 말씀 쫀득하다 어머니 묵 그릇 같은 유언 눈동자에 싸서 집으로 가져온다 풀어보니 검게 탄 일생이 누워 있다 입안에서 엄마 생각이 물컹거린다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문학이야기/자작시 2024.12.25
숟가락을 놓다 / 이 효 그림 / 정도나숟가락을 놓다 / 이 효낡은 부엌문 바람이 두들기는데빈 그릇에 바람 소리 말을 더듬고장작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둥근 밥상에 수저 두 개 올려놓고비린내 나는 생선을 굽는다할머니 나물 팔던 손으로부엌문 활짝 열어 놓았다바람은 잠시 단추를 채우고 나간다그림자 된 춥고 외로운 사람들쓰러진 술병처럼 몸이 얼었다 녹는다산산이 발려진 생선 가시의 잔해들무표정한 가시를 모아 땅에 묻는다상처 난 것들 위로 첫눈이 내린다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부엌에 온기를 넣는 것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문학이야기/자작시 2024.12.23
뭉크의 절규 / 이효 뭉크의 절규 / 이효두렵다는 것은 슬픈 것이다어미를 넘어트린 덩치 큰 염소칠판 위에 붙은 교훈 분필 가루가 되어 교실 안이 술렁인다무질서는 유죄일까? 무죄일까?옆구리 차기로 운동화 날아오고 교사의 비명은 털이 뽑혔다글썽인다, 겁에 질린 어린 눈망울들밟지 말아야 할 스승의 그림자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되어 밟힌 지 오래다 병원으로 실려간 어미는 암막 커튼을 친다다시 초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천년이 흘러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뭉크는 불안한 내일을 다시 부르고 있다이효 시인 / 장미는 고양이다 문학이야기/자작시 2024.12.22
첫눈 / 이 효 첫눈 / 이 효밤사이 내린 눈내 마음에 쌓여그리운 얼굴 깊어진다슬픈 눈동자 털어내려새벽 숲을 밟는 고요더 깊어진 애증의 눈빛순간, 와르르새소리에 놀란 소나무하얀 입술 쏟아진다발자국 남긴 첫 키스가 쓰다 문학이야기/자작시 2024.12.22
새해가 내려요 / 이효 새해가 내려요 / 이효 꿈틀거리는 지난 시간의 내장들끊어진 소통 위로 눈이 내린다 방전된 몸으로 새해를 넘어온 사람들아픈 손톱에 첫눈을 발라준다뽀얀 속살이 차곡차곡 쌓인 달력을 단다 말풍선에 매달린 섬들은 소통하고유리벽을 타는 용서가 녹아내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가 찰칵 찍어 놓은, 첫눈 오는 날핸드폰 속에서 풍겨오는 사람 내음눈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그렁한 눈발로 묻는다 까똑 까똑 까똑 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문학이야기/자작시 2024.12.20
콩고강 연가 / 이효 그림 / 박정실콩고강 연가 / 이 효 야자수는 홀로 노래 부른다고향은 외딴섬 수평선 너머 흑백 사진으로 몸살 앓는다 하루 종일 숲에서 서성이며고향의 소리를 더듬는다 마음 밭에 그리움이 붉다 숲은 한 방울의 눈물로 푸른 옷을 갈아입는다기억의 장소로 떠날 채비를 한다 섬과 섬 사이, 뼈마디로 다리를 놓는다홀로 출렁거렸을 침묵의 물결그리움은 먼 하늘이 된다 나무의 오랜 꿈, 석양에 쓰는 편지 슬프지만 잘 견디어 냈노라고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문학이야기/자작시 2024.12.20
삼각 김밥 번호 / 이효 삼각 김밥 번호 / 이효 수저와 수저 사이의 기다림은 독거노인의 긴 한숨 현관문 열어 놓고이봐 젊은이, 날 좀 앉혀주게나 뼈만 남은 휠체어 바퀴를 보며슬금슬금 사라지는 그림자들 뒤척이던 바퀴가 편의점 가는 날삼각 김밥 하나, 풀지 못하는 남자 하얀 밥과 김 따로, 내 자식들 같다남자의 일회용 눈물이 쏟아진다 검정 모서리 씹는 서녘의 한 입쪼그리고 앉은 시간이 중얼거린다 이젠, 삼각 김밥마저 을큰하다이효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문학이야기/자작시 2024.12.19
[박미섬의 홀리는 시집 읽기] 이효 시집 ‘장미는 고양이다’ 오월의 발톱'을 세우고 비광飛光의 춤을! 이효 시인 시인은 고통에서 치유를, 슬픔에서 기쁨을 끌어내는 존재다. 시를 사랑하는 존재이면서 시를 통해 사랑을 전하는 존재다. 제2시집 ‘장미는 고양이다’에서 이효 시인은 황폐한 현대성을 넘어서는 위험한 사랑을 감각적이고 독창적인 언어로 전해준다. 이는 ‘시인의 말’에 응축되어 있다. 눈동자에 빛이 들어온다 새벽을 통과한 나뭇가지들 잎맥은 속도를 기억한다 태양이 나뭇잎 위로 미끄러지면은빛으로 변한 들고양이들 飛光의 춤을 춘다(‘시인의 말’) ‘시인의 말’은 시집의 서문 격인 시. “태양이 나뭇잎 위로 미끄러지면” 들고양이들은 ‘비광’, 날아오르는 빛의 춤을 춘다.은빛으로 변한 들고양이들의 자태가 사뭇 날렵하다. 태양에서 .. 문학이야기/자작시 2024.12.15
두부의 연가 / 이효 두부의 연가 / 이효 검정 비닐 속 뭉개진 두부는 버리지 마, 기울어지는 식탁 모서리냉장고 속에서 냉기를 먹는 하루 황금 들판을 기억하며멍석 위에서 슬픔을 말리는 여자 누군가 힘껏 내리친 도리깨꿈은 먼 하늘로 튕겨나간다 탁탁 탁탁탁 탁탁 탁탁모진 시간이 여자의 껍질을 벗긴다 차가운 물속에서 불은 낮과 밤 젖은 몸 일으켜 세운다 세상 오래 살다 보면 두부도 뭉개지잖아 여자의 무너진 몸이 우렁우렁 운다 서로의 얼굴에 생채기를 낸 저녁열 개의 손가락으로 만두를 다시 빚는다 무너진 사랑은 저버리는 게 아니야 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문학이야기/자작시 2024.12.05
감나무와 어머니 / 이효 감나무와 어머니 / 이효 당신과 함께 심었습니다손가락만 한 감나무 돌짝밭 손끝이 닳도록 함께 땅을 파내려 갔습니다 바람은 햇살을 끌어다 주고가족은 새벽을 밀었습니다 오늘, 그 감을 따야 하는데 당신은 가을과 함께 먼 곳으로떠나셨습니다 식탁 위 접시에 올려진 감 하나차마 입으로 깨물지 못합니다 한평생 자식들에게하나님의 사랑과 헌신을온몸으로 땅에 쓰고 가르치신 어머니 그렁한 내 눈은 붉은 감빛이 되었습니다 이효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문학이야기/자작시 2024.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