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186

해바라기 / 이 효

그림 : 차 정 미 ​ ​ ​ 해바라기 / 이 효 ​ ​ 차마 당신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한곳을 향해서 달려가던 마음이 슬픈 자화상 속으로 걸어갑니다 ​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어린 자식을 키워내고 늘 해바라기처럼 반듯하게 살았는데 ​ 아닙니다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입안에 자갈을 물고 살았는데 왜 이제서야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당연히 여겨지지 않는지 ​ 고개를 들고 있는 저 노란 해바라기에게 묻고 싶습니다 태양 속으로 걸어들어가면 타버리는지? 재로 남을지언정 가보고 싶습니다 ​ ​ 늦은 오후 해바라기가 돌아서는 까닭은 한 장의 종이 위에 펄떡이는 마지막 숨을 시 한 방울로 해바라기를 그리고 싶습니다. ​ ​ ​ ​ 그림 / 차 정 미

담장 안의 남자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 담장 안의 남자 / 이 효 ​ ​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수다 소리 남자가 하루 세끼 쌀밥 꽃만 먹는다 내게 말을 시키지 않으면 좋겠어 드라마를 보면 왜 찔찔 짜는지 ​ 남자는 억울하단다 죄가 있다면 새벽 별 보고 나가서 자식들 입에 생선 발려 먹인 것 은퇴하니 투명인간 되란다 한 공간에서 다른 방향의 시선들 ​ 담장이 너무 높다 기와가 낡은 것을 보니 오랫동안 서로를 할퀸 흔적들 흙담에 지지대를 세운다 ​ 나이가 들수록 무너지는 담을 덤덤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자 남자는 거울 속 여자가 낯설다 ​ 벽에다 쏟아부었던 메아리 담장 안의 남자와 담장 밖의 여자 장미꽃과 가시로 만나 끝까지 높은 담을 오를 수 있을까 ​ ​ ​ ​ ​ ​

거미줄에 은구슬 / 이 효

​ ​ ​ 거미줄에 은구슬 / 이 효 ​ ​ 비 갠 아침 거미줄에 매달린 은구슬 누런 고무줄보다 질긴 바람에도 펄럭이고 나부꼈을 거미줄 같은 엄마의 하루 ​ 한평생 끊어질 듯 말 듯한 거미줄 닮은 엄마 목에 투명한 은구슬 따다가 살짝 걸어 드렸더니 거미줄에 엄마 눈물 매달린다 ​ 열 손가락 활짝 펴서 엄마 나이 세어 보다가 은구슬 세어 보다가 떨어지는 은구슬 안타까워 살며시 손가락 집어넣는다 ​ 산 입에 거미줄 치겠니 하던 엄마의 목소리 멀어질 때 아침 햇살에 엄마 나이 뚝 하고 떨어진다. ​ ​ ​ 신문예 107호, 2021 5/6 ​

떨어질까 봐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떨어질까 봐 / 이 효 구름다리 건너온 봄 사발에 웃음소리 소복이 담더니 술주정꾼 할아비처럼 사발을 업는구나 산수유 쏟아진다 할아비 홀리는 금잔디 다방 누나처럼 입술에 빨간 꽃분도 바르지 않고 까르륵 웃는 웃음이 더 예쁜 꽃 가을에는 빨간 열매가 붉은 단풍잎에 가려 슬프기도 하련만 새들과 함께 노는 모습 세상 욕심이 없는 할아비 닮은 산수유 세상을 노랗게 물들인 웃음들 투박한 사발에 주워 담는다 꽃상여는 구름다리 건넌다 할아비가 노란 우산 접은 날 먼 산에 바위도 울음을 참는다 조금 남은 산수유마저 떨어질까 봐.

구름다리 만들거라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구름다리 만들거라 / 이 효 이른 아침 새들 날더니 불암산이 꽃치마 둘렀다 천년의 세월을 앞산과 눈맞춤 하더니 기다림에 지쳐 눈에도 꽃이 피었다 세상 사람들 일 년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랑을 불암산은 밤마다 별을 보고 달을 보고 천년 세월 기다린다 이른 새벽 너 닮은 붉은 별을 산등성에 한가득 쏟아 놓았다 바위에 새겨진 연서가 너무 붉다 흘러가는 구름아! 새 신부 나가신다. 어서, 구름다리 만들거라 새신랑 열두 폭 그림 메고 오신다 살갗 흔들리는 꽃잎에 나비 앉는다 사랑은 그렇게 윤기나는 그리움을 견뎌온 일이다.

모과 향기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모과 향기 / 이 효 누군가 내 말을 오해할 때 누군가 내 말을 듣지 않을 때 접시 위에 올려놓은 울퉁한 모과처럼 내 가슴 안에 노란 멍이 차오른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누군가 내 안에 말들을 꺼내주지 않을 때 접시 위에 올려놓은 점박이 모과처럼 몸에 검은 병이 차오른다 햇살이 따사롭다 아프지만 모과의 흠집을 도려낸다 내 안에 골은 상처를 터트린다 뽀얗게 드러난 모과 살을 볕 좋은 곳에 말린다 나도 푸른 잔디에 누워 하늘을 쳐다본다 모과에서 향기가 나듯이 슬픔을 말린 내게서 풍경이 보인다.

늦은 오후에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늦은 오후에 / 이 효 ​ 수국의 환한 미소를 꺾어 유리잔에 꽂아 놓았다 내 사랑을 저울에 올려보니 눈금이 울고 있다 ​ 마음에 이름을 담아 너를 안아보았지만 은빛 물결처럼 얇은 내 마음 투명 유리잔에 비친다 ​ 창틈으로 들어오는 빛 붉은 수국은 몸을 기댄다 미소를 꺾어버린 나는 종일 네 그림자 곁을 맴돈다 ​ 환한 미소는 초록 날개를 달아줄 때 더욱 곱게 피어오른다는 것을 너무 늦은 오후에 알았다

미얀마의 봄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미얀마의 봄 / 이 효 ​ 목련이 피기도 전에 떨어진다 수북이 떨어진 꽃잎 밟지 마라 누군가 말한다 꽃잎이 떨어진다고 뭐가 달라지나 ​ 붉은 핏방울 땅을 흥건히 적신다 자유를 향한 목소리 총알을 뚫는다 치켜올린 세 개의 손가락 끝에 파란 싹이 솟아오른다 ​ 밤새도록 울부짖던 어머니의 기도 붉은 등불로 뜨겁게 타오른다 오늘 밤에도 미얀마의 봄을 위해 타오르다 떨어지는 젊은 영혼들 ​ 잔인한 4월의 봄은 붉은 목련에 총알을 박는다 그래도 봄은 다시 온다. ​ ​ ​ 미얀마의 소식이 뉴스를 통해서 전해진다. 젊은 청년들을 비롯해서 어린아이들까지 목숨을 잃고 있다. 미얀마 국민들은 군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매일 벌이고 있지만 군경은 선량한 국민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민가에 ..

벚꽃 엔딩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벚꽃 엔딩 / 이 효 ​ 마음에 몰래 사랑을 품은 게 무슨 죄라고 꽃잎 저리도 붉은가요 지난밤에 봄비 내리더니 흥건히 젖은 마음 붉게 호수에 펼쳐 놓았군요 머물지 못할 사랑이라면 구름으로 나룻배 띄워 소리 없이 떠나시구려 ​ 만개한 벚꽃은 꿈결 같았다. 간밤에 봄비 내리더니 춤추며 떨어지는 꽃잎들~ ​ 단 며칠만의 달콤한 사랑이었지만 내 평생 살아가는 동안 뜨거운 사랑 마음에 한 장 걸어놓고 살아가렵니다. ​

혼자 부르는 노래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혼자 부르는 노래 / 이 효 ​ 야자수는 혼자 노래 부른다 외딴섬에서 수평선 넘어 고향은 흐린 흑백 사진 ​ 하루 종일 숲에서 고독의 색과 소리를 찾는다 마음 밭에 붉은 불길이 고향을 향해서 일어선다. ​ 비가 그친 맑은 오후 숲은 한 방울의 눈물로 푸른 옷을 갈아입는다 기억의 장소로 떠날 준비를 한다 ​ 섬과 섬 사이 뼈마디로 다리를 놓는다 ​ 혼자 출렁이는 깊은 물결 그리움은 강물처럼 구름이 된다 ​ 야자수는 혼자 노래를 부른다. 나뭇가지로 석양에 쓰는 편지 슬프지만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