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194

해장국 끓이는 여자와 꽃

그림 : 김 정 수 ​ 해장국 끓이는 여자와 꽃 / 이 효 ​ 사람들이 잠든 새벽 해장국 끓이는 여자는 가슴에 꽃씨를 품는다 ​ 내일은 해장국집 간판 내리는 날 애꿎은 해장국만 휘휘 젓는다 ​ 옆집 가계도, 앞집 가계도 세상 사람들이 문 앞에 세워놓은 눈사람처럼 쓰러진다 희망이 다 사라진 걸까 ​ 화병 안에 환하게 웃고 있는 꽃송이 하나 뽑아 가계 앞 눈사람 가슴에 달아준다 ​ 무너지지 마 오늘 하루만 더 버텨보자 폭풍 속에 나는 새도 있잖아 ​ 가마솥에 꽃이 익는다 여자는 마지막 희망을 뚝배기에 담는다 눈물 한 방울 고명으로 떠있다 ​

부엌 앞에 선 바람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부엌 앞에 선 바람 / 이 효 낡은 부엌문 바람이 두들기는데 그대 문 열어준 적 있는가 차가운 빈 그릇에 바람 소리 말을 더듬고 누군가는 마음에 붉은 사랑 담아내는데 내 마음은 닫혀있는 고양이 눈 찬 부뚜막에 엎드려 기도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부엌에 온기를 넣는 것 둥근 밥상에 수저 두 개 올려놓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굽는 일 차가운 바람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살며시 부엌 문을 열어주는 것 부뚜막 위로 햇살이 엎질러지고 바람은 잠시 단추를 채우고 돌아나간다 그림자처럼 춥고 외로운 사람들 쓰러진 술병처럼 몸이 얼었다 녹는다 산산이 발려진 생선 가시들의 잔해들 무표정한 가시들을 모아 땅에 묻는다 상처 난 것들 위로 첫눈이 하얗게 내린다 바람이 붉다

호박에 관하여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호박에 관하여 / 이 효 ​ 벽 같은 영감탱이라고 밤낮 소리 질렀는데 그래도 못난 마누라 배 나왔다고 등 받쳐주는 건 당신뿐이구려 ​ 내 손바닥 거칠다고 손 한 번 잡아주지 않더니 간밤에 슬며시 까칠한 잎 담장 위에 올려놓은 건 당신뿐이구려 ​ 이웃집 늙은 호박 누렇게 익어 장터에 팔려 나갔는데 시퍼렇게 익다만 내게 속이 조금 덜 차면 어떠냐고 한 번 맺은 인연 끈지 말자며 투박한 말 건넨 건 당신뿐이구려 ​ 둥근 호박 메달은 긴 목 바람에 끊어져 나갈까 봐 몸에 돌을 쌓고 흙을 발라서 바람 막아주는 건 당신뿐이구려 ​ 영감, 조금만 참아주시오 내 몸뚱이 누렇게 익으면 목줄 끊어져도 좋소 당신을 위해서라면 호박죽이 될망정 뜨거운 가마솥에 들어가리라 ​ 늙어서 다시 한번 펄펄 끓고 ..

마음의 꽃병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마음의 꽃병 / 이 효 ​ 한 해가 다 저물기 전에 담밖에 서 있는 너에게 담안에 서 있는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 보인다 ​ 높은 담만큼이나 멀어졌던 친구여 가슴에 칼날 같은 말들이랑 바람처럼 날려버리자 ​ 나무 가지만큼이나 말라버린 가슴이여 서먹했던 마음일랑 눈송이처럼 녹여버리자 ​ 오늘 흰 눈이 내린다 하늘이 한 번 더 내게 기회를 준 것 같구나 하얀 눈 위에 글씨를 쓴다 ​ 내 마음의 꽃병이 되어다오. ​

구부러진 골목길 / 이 효

​ 구부러진 골목길 / 이 효 ​ 허름한 대문 앞 붉은 화분을 보면 꽃 속에서 주인의 얼굴이 보인다 ​ 지붕 위로 엉켜진 전깃줄을 보면 어머니의 구수한 잔소리가 들린다 ​ 골목길 자전거 바퀴를 보면 동네 아낙네들 굴러가는 수다 소리가 들린다 ​ 배가 불뚝한 붉은 항아리를 보면 할아버지 큰 바가지로 막걸리 잡수시던 술배가 생각난다 ​ 구부러진 골목 안에는 이름만 부르면 뛰어나올 것 같은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 멀리서 보이는 고층 아파트가 군화를 신고 달려온다. 새들이 날아가 버린 나무에 붉은 감이 울고 있다. ​

돌담에 햇살처럼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돌담에 햇살처럼 / 이 효 돌담에 악보를 그리는 햇살같이 청춘들이 고요한 노래로 물든다 돌담을 타고 오르는 푸른 잎같이 오늘 하루 하늘의 주인공이 된다 서로를 끌어안은 돌담 같은 청춘들 바다에서 굴러온 돌들 강에서 굴러온 돌들 밭에서 굴러온 돌들 벽이 되어준 부모를 떠나서 스스로 벽이 된다 비가 오면 더욱 선명해지는 벽의 색깔들 가난이 푹푹 쌓여도 햇살을 기다린다 공이 벽으로 날아와도 푸른 잎으로 막는다 돌담에 햇살이 비치면 배가 항해를 떠난다.

사과이고 싶습니다 / 이 효

그림 : 김정수 사과이고 싶습니다 / 이 효 12월이 되면 몸은 새 문턱 앞에서 서성이는데 마음은 시퍼런 이끼로 가득합니다 그동안 미안하다고 건네지 못한 인사 때문입니다 그동안 감사하다고 전하지 못한 인사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랑한다고 전하지 못한 인사 때문입니다 사과나무는 과실을 떨쳐 버렸는데 내 마음은 누런 잎들만 가득합니다 12월이 되면 사르륵 녹아내리는 한 입의 사과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