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186

돌담에 햇살처럼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돌담에 햇살처럼 / 이 효 돌담에 악보를 그리는 햇살같이 청춘들이 고요한 노래로 물든다 돌담을 타고 오르는 푸른 잎같이 오늘 하루 하늘의 주인공이 된다 서로를 끌어안은 돌담 같은 청춘들 바다에서 굴러온 돌들 강에서 굴러온 돌들 밭에서 굴러온 돌들 벽이 되어준 부모를 떠나서 스스로 벽이 된다 비가 오면 더욱 선명해지는 벽의 색깔들 가난이 푹푹 쌓여도 햇살을 기다린다 공이 벽으로 날아와도 푸른 잎으로 막는다 돌담에 햇살이 비치면 배가 항해를 떠난다.

사과이고 싶습니다 / 이 효

그림 : 김정수 사과이고 싶습니다 / 이 효 12월이 되면 몸은 새 문턱 앞에서 서성이는데 마음은 시퍼런 이끼로 가득합니다 그동안 미안하다고 건네지 못한 인사 때문입니다 그동안 감사하다고 전하지 못한 인사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랑한다고 전하지 못한 인사 때문입니다 사과나무는 과실을 떨쳐 버렸는데 내 마음은 누런 잎들만 가득합니다 12월이 되면 사르륵 녹아내리는 한 입의 사과이고 싶습니다.

겨울 등불 (자작 시)

겨울 등불 / 이 효 저 붉은 장미 운다 울고 있다 무슨 할 말이 남았을까 하얀 망사 쓰고 서성인다 시집 한 번 갔다 왔다고 바다가 섬이 되는 것도 아닌데 가슴에 푹푹 찬 눈이 쌓인다 새 출발 하는 날 길이 되어준다는 사람 앞에서 뜨는 별이 되어라 자식 낳고 잘 살면 된다 돌아가신 할머니 말씀 환하다 창밖에 눈이 내린다 살다가 힘들면 가시 하나 뽑아라 속없는 척 살면 되지 몸에 가시가 모두 뽑히면 장미도 겨울 등불이 된다. 등불은 또 살아있는 시가 된다.

어여 내려가거라 (자작 시)

그림 : 김 정 수 어여 내려가거라 / 이 효 흰 눈이 쌓인 산골짝 한 사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하늘을 향해 달리던 푸른 나뭇잎들 떨어지기는 한순간 이유도 모른 채 해고된 직장 포장마차 앞에서 토해낸 설음이 저 계곡물만 하랴 이 물을 모두 마시면 서러움이 씻겨나가려나 어린 자식들 앞 차마 얼굴을 보일 수 없어 올라온 겨울 산 하얀 눈발에 내려갈 길이 아득히 멀다 계곡 같은 어머니 늘어진 젖가슴으로 아들을 안아주신다 어여 내려가거라 따뜻한 어머니 맨손 하얀 눈 위에 손자국 내어주신다.

눈사람 일기 ( 이 효 )

​ 아빠처럼 / 이 효 ​ 나는 매일 꿈을 꾸지 아빠처럼 커지는 꿈을 ​ 오늘은 아빠가 되었어 아빠 장갑 아빠 모자 ​ 아빠 마음은 어디다 넣을까 가슴에 넣었더니 너무 따뜻해서 눈사람이 녹아버렸네. ​ ​ 눈사람 입 / 이 효 ​ 눈 사람 입은 어디 있지? 엄마가 예쁘다고 뽀뽀해 주었더니 앵두처럼 똑 떨어졌네. ​ ​ 가족 / 이 효 ​ 아빠는 회사 가고 엄마는 학교 가고 오빠는 학원 가고 동생은 어린이집 가고 나는 유치원 간다. ​ 매일매일 바쁜 우리 가족 눈이 내린 날 눈사람 만든다고 모두 모였다. ​ 매일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 귀가 큰 눈사람 / 이 효 ​ 코로나로 세상이 시끄럽다 국회의원 아저씨들 매일 싸운다 우리들 보고 싸우지 말라더니 내 귀는 점점 커진다 시끄러운 세상이 하얀 눈에 ..

사랑의 색 (지작 시)

그림 : 김 은 숙 사랑의 색 / 이 효 사랑의 색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눈을 지그시 감고 붉은 튜립 꽃 봉오리라 말할래요. 사랑의 색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꽃봉오리를 들어 올린 깊고 푸른 잎이라 말할래요. 사랑의 색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한 평생 뿌리를 보듬어 준 양철 화분 같은 당신이라고 말할래요. 사랑은 함께 가는 장거리 경주잖아요.

가을에 대하여 (자작 시)

가을에 대하여 / 이 효​ 누가 불붙여 놓았나 저 가을 산을 하나의 사랑이 된다는 것은 붉은빛이 노란빛으로 타오르다 고요하게 가라앉는 것 하나의 사랑이 된다는 것은 모난 바위가 서로 상처로 굴러가다가 둥근 바위로 물가에 자리를 잡는 것 하나의 사랑이 된다는 것은 결국 자기 가슴 박힌 못에 가을 풍경 한 장 거는 일이다

외돌개의 꿈

외돌개의 꿈 : 김 정 수 외돌개의 꿈 / 이 효 ​ 울고 싶은 날 바다에 그림을 그렸다 그네처럼 술에 흔들리는 아버지 옥수수 알갱이 같은 자식들 죽어 별이 되는데 아버지는 밖에서 알갱이 한 알 강포에 싸오신다 빨랫줄에 구멍 난 속옷들이 서울로 달아난다 찌그러진 양푼이에 바다를 푹푹 끓여 팔았다 시퍼런 몸뚱이 쓰러질 때마다 외돌개의 꿈은 뜨겁다 겨울 문턱 넘는 그림쟁이 왜 울고 싶지 않았겠나 ​발효되지 못한 인생 새벽 불빛 시어지도록 눈 내린 벌판에 붓질을 한다 외돌개의 꿈이 바다에 허파로 우뚝 솟아오른다

나무 한 그루 / 이 효 (자작 시)

그림 : 최 선 옥 ​ ​ 나무 한 그루 / 이 효 ​ 팔순 노모 새 다리 닮은 다리로 절뚝거리며 걷는다 저 다리로 어찌 자식들 업고 찬 강물을 건넜을까 ​ 찬바람 부는 날 아버지 닮은 나무 옆에 앉는다 영감 나도 이제 당신 곁으로 가야겠소 나무는 대답이 없다 ​ 텅 빈 공원에 쪼그만 새를 닮은 어머니 훌쩍 어디론가 날아갈까 봐 내 가슴에 푸른 나무 한 그루 부지런히 눈물로 키운다. ​ 눈에는 붉은 산이 들어앉아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