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부엌 앞에 선 바람 / 이 효

푸른 언덕 2021. 1. 3. 17:18

그림 : 김 정 수 <작품>


부엌 앞에 선 바람 / 이 효

낡은 부엌문 바람이 두들기는데
그대 문 열어준 적 있는가
차가운 빈 그릇에 바람 소리 말을 더듬고
누군가는 마음에 붉은 사랑 담아내는데
내 마음은 닫혀있는 고양이 눈
찬 부뚜막에 엎드려 기도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부엌에 온기를 넣는 것
둥근 밥상에 수저 두 개 올려놓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굽는 일
차가운 바람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살며시 부엌 문을 열어주는 것

부뚜막 위로 햇살이 엎질러지고
바람은 잠시 단추를 채우고 돌아나간다
그림자처럼 춥고 외로운 사람들
쓰러진 술병처럼 몸이 얼었다 녹는다
산산이 발려진 생선 가시들의 잔해들

무표정한 가시들을 모아 땅에 묻는다
상처 난 것들 위로 첫눈이 하얗게 내린다
바람이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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