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호박에 관하여 / 이 효

푸른 언덕 2020. 12. 29. 19:07

그림 : 김 정 수 <작품>

호박에 관하여 / 이 효

벽 같은 영감탱이라고

밤낮 소리 질렀는데

그래도 못난 마누라 배 나왔다고

등 받쳐주는 건 당신뿐이구려

내 손바닥 거칠다고

손 한 번 잡아주지 않더니

간밤에 슬며시 까칠한 잎

담장 위에 올려놓은 건 당신뿐이구려

이웃집 늙은 호박 누렇게 익어

장터에 팔려 나갔는데

시퍼렇게 익다만 내게

속이 조금 덜 차면 어떠냐고

한 번 맺은 인연 끈지 말자며

투박한 말 건넨 건 당신뿐이구려

둥근 호박 메달은 긴 목

바람에 끊어져 나갈까 봐

몸에 돌을 쌓고 흙을 발라서

바람 막아주는 건 당신뿐이구려

영감, 조금만 참아주시오

내 몸뚱이 누렇게 익으면

목줄 끊어져도 좋소

당신을 위해서라면

호박죽이 될망정

뜨거운 가마솥에 들어가리라

늙어서 다시 한번 펄펄 끓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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