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170

호박에 관하여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호박에 관하여 / 이 효 ​ 벽 같은 영감탱이라고 밤낮 소리 질렀는데 그래도 못난 마누라 배 나왔다고 등 받쳐주는 건 당신뿐이구려 ​ 내 손바닥 거칠다고 손 한 번 잡아주지 않더니 간밤에 슬며시 까칠한 잎 담장 위에 올려놓은 건 당신뿐이구려 ​ 이웃집 늙은 호박 누렇게 익어 장터에 팔려 나갔는데 시퍼렇게 익다만 내게 속이 조금 덜 차면 어떠냐고 한 번 맺은 인연 끈지 말자며 투박한 말 건넨 건 당신뿐이구려 ​ 둥근 호박 메달은 긴 목 바람에 끊어져 나갈까 봐 몸에 돌을 쌓고 흙을 발라서 바람 막아주는 건 당신뿐이구려 ​ 영감, 조금만 참아주시오 내 몸뚱이 누렇게 익으면 목줄 끊어져도 좋소 당신을 위해서라면 호박죽이 될망정 뜨거운 가마솥에 들어가리라 ​ 늙어서 다시 한번 펄펄 끓고 ..

마음의 꽃병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마음의 꽃병 / 이 효 ​ 한 해가 다 저물기 전에 담밖에 서 있는 너에게 담안에 서 있는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 보인다 ​ 높은 담만큼이나 멀어졌던 친구여 가슴에 칼날 같은 말들이랑 바람처럼 날려버리자 ​ 나무 가지만큼이나 말라버린 가슴이여 서먹했던 마음일랑 눈송이처럼 녹여버리자 ​ 오늘 흰 눈이 내린다 하늘이 한 번 더 내게 기회를 준 것 같구나 하얀 눈 위에 글씨를 쓴다 ​ 내 마음의 꽃병이 되어다오. ​

구부러진 골목길 / 이 효

​ 구부러진 골목길 / 이 효 ​ 허름한 대문 앞 붉은 화분을 보면 꽃 속에서 주인의 얼굴이 보인다 ​ 지붕 위로 엉켜진 전깃줄을 보면 어머니의 구수한 잔소리가 들린다 ​ 골목길 자전거 바퀴를 보면 동네 아낙네들 굴러가는 수다 소리가 들린다 ​ 배가 불뚝한 붉은 항아리를 보면 할아버지 큰 바가지로 막걸리 잡수시던 술배가 생각난다 ​ 구부러진 골목 안에는 이름만 부르면 뛰어나올 것 같은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 멀리서 보이는 고층 아파트가 군화를 신고 달려온다. 새들이 날아가 버린 나무에 붉은 감이 울고 있다. ​

돌담에 햇살처럼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돌담에 햇살처럼 / 이 효 돌담에 악보를 그리는 햇살같이 청춘들이 고요한 노래로 물든다 돌담을 타고 오르는 푸른 잎같이 오늘 하루 하늘의 주인공이 된다 서로를 끌어안은 돌담 같은 청춘들 바다에서 굴러온 돌들 강에서 굴러온 돌들 밭에서 굴러온 돌들 벽이 되어준 부모를 떠나서 스스로 벽이 된다 비가 오면 더욱 선명해지는 벽의 색깔들 가난이 푹푹 쌓여도 햇살을 기다린다 공이 벽으로 날아와도 푸른 잎으로 막는다 돌담에 햇살이 비치면 배가 항해를 떠난다.

사과이고 싶습니다 / 이 효

그림 : 김정수 사과이고 싶습니다 / 이 효 12월이 되면 몸은 새 문턱 앞에서 서성이는데 마음은 시퍼런 이끼로 가득합니다 그동안 미안하다고 건네지 못한 인사 때문입니다 그동안 감사하다고 전하지 못한 인사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랑한다고 전하지 못한 인사 때문입니다 사과나무는 과실을 떨쳐 버렸는데 내 마음은 누런 잎들만 가득합니다 12월이 되면 사르륵 녹아내리는 한 입의 사과이고 싶습니다.

겨울 등불 (자작 시)

겨울 등불 / 이 효 저 붉은 장미 운다 울고 있다 무슨 할 말이 남았을까 하얀 망사 쓰고 서성인다 시집 한 번 갔다 왔다고 바다가 섬이 되는 것도 아닌데 가슴에 푹푹 찬 눈이 쌓인다 새 출발 하는 날 길이 되어준다는 사람 앞에서 뜨는 별이 되어라 자식 낳고 잘 살면 된다 돌아가신 할머니 말씀 환하다 창밖에 눈이 내린다 살다가 힘들면 가시 하나 뽑아라 속없는 척 살면 되지 몸에 가시가 모두 뽑히면 장미도 겨울 등불이 된다. 등불은 또 살아있는 시가 된다.

어여 내려가거라 (자작 시)

그림 : 김 정 수 어여 내려가거라 / 이 효 흰 눈이 쌓인 산골짝 한 사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하늘을 향해 달리던 푸른 나뭇잎들 떨어지기는 한순간 이유도 모른 채 해고된 직장 포장마차 앞에서 토해낸 설음이 저 계곡물만 하랴 이 물을 모두 마시면 서러움이 씻겨나가려나 어린 자식들 앞 차마 얼굴을 보일 수 없어 올라온 겨울 산 하얀 눈발에 내려갈 길이 아득히 멀다 계곡 같은 어머니 늘어진 젖가슴으로 아들을 안아주신다 어여 내려가거라 따뜻한 어머니 맨손 하얀 눈 위에 손자국 내어주신다.

눈사람 일기 ( 이 효 )

​ 아빠처럼 / 이 효 ​ 나는 매일 꿈을 꾸지 아빠처럼 커지는 꿈을 ​ 오늘은 아빠가 되었어 아빠 장갑 아빠 모자 ​ 아빠 마음은 어디다 넣을까 가슴에 넣었더니 너무 따뜻해서 눈사람이 녹아버렸네. ​ ​ 눈사람 입 / 이 효 ​ 눈 사람 입은 어디 있지? 엄마가 예쁘다고 뽀뽀해 주었더니 앵두처럼 똑 떨어졌네. ​ ​ 가족 / 이 효 ​ 아빠는 회사 가고 엄마는 학교 가고 오빠는 학원 가고 동생은 어린이집 가고 나는 유치원 간다. ​ 매일매일 바쁜 우리 가족 눈이 내린 날 눈사람 만든다고 모두 모였다. ​ 매일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 귀가 큰 눈사람 / 이 효 ​ 코로나로 세상이 시끄럽다 국회의원 아저씨들 매일 싸운다 우리들 보고 싸우지 말라더니 내 귀는 점점 커진다 시끄러운 세상이 하얀 눈에 ..

사랑의 색 (지작 시)

그림 : 김 은 숙 사랑의 색 / 이 효 사랑의 색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눈을 지그시 감고 붉은 튜립 꽃 봉오리라 말할래요. 사랑의 색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꽃봉오리를 들어 올린 깊고 푸른 잎이라 말할래요. 사랑의 색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한 평생 뿌리를 보듬어 준 양철 화분 같은 당신이라고 말할래요. 사랑은 함께 가는 장거리 경주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