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뒷모습 / 이 효

푸른 언덕 2021. 1. 29. 17:49

그림 : 김 정 수

 

뒷모습 / 이 효

앞집 훈이 아저씨가 은퇴를 하셨다

병원장님 댁 정원사로 일을 하셨다

빠른 손놀림을 눈여겨 본 병원장님은

아저씨를 병원 기관실로 보내셨다

첫 출근이었다

아저씨 인생이 별거 아니라는 사람들

그래도 새벽부터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아저씨는 병원 문턱이 닳도록 일을 하셨다

열등감 따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어린 아들을 세명이나 키워야 했다

한 평생 전투를 하듯이 살아온 인생도

국수발 잘리듯이 잘여나가는 시간이 왔다

은퇴를 하란다.

느린 손놀림은 헛헛한 웃음만 자아낸다.

마지막 퇴근길에 아픈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 병원 앞 욕쟁이 할머니네서 만둣국을

포장했다.

할머니의 마지막 말씀은 뒤지지 말고 살란다

상 위에 오른 만두를 자른다

아직도 배가 통통해서 견딜만한데

누군가 배를 날카로운 수저로 가른다

버티고 있는 나에게 박박 문지르는 마지막 수저의

힘은 아프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속을 내어준다

서른이 넘은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대신하겠단다

언젠가는 아들 배도 내 배처럼 터지겠지

그 허망함 때문에 그 길을 가지 말라고 막는다

비싼 등록금을 드려서 대학까지 보낸 아들

내 누추한 삶을 닮지 말라고 밤마다 기도했던

아들이다

세상 참 녹녹하지 않다

인생이 질긴 것이라지만 부자의 닮은 인생이

더 질기다

아들이 첫 출근을 한다

멀리서 보이는 아들의 뒷모습이 안쓰럽다

아들 어릴 적에 어머님께서 지 아버지 엉덩이랑

아들 엉덩이랑 똑 닮았다고 해서 참 좋아하셨다

오늘은 나를 닮은 아들의 엉덩이가 너무 안쓰럽다

의자에 한 번도 앉아보지 못할 고단한 하루가

생각나서 내 눈동자가 흔들린다.

삶이 드라마처럼 화려하지도 못한 인생들

식은 만두가 목에 매달려 터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문학이야기 > 자작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미역 4번 출구  (0) 2021.02.02
누구 어디 없소  (0) 2021.01.31
함박 웃음 / 이 효  (0) 2021.01.28
해장국 끓이는 여자와 꽃  (0) 2021.01.17
첫사랑 / 이 효  (0) 2021.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