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186

보름달 (자작 시)

보름달 / 이 효 아침부터 보름달을 만든다. 하나는 당신을 위하여 또 하나는 나를 위하여 녹두를 갈아서 노란 달빛 띄우고 쌀가루 넣어서 끈적한 정붙인다 갓짜온 들기름 한 수저에 서운한 시간들 미끄러진다 젊은 날 사랑의 맹세 지키려고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지지고 볶고 노랗게 익었다 정월 대보름에 쌍둥이 달이 떴다 얼마나 긴 세월 마주했기에 저리도 닮았을까? 내 배 안에 보름달이 불룩하다 당신 배 안에 보름달이 불룩하다.

미련한 곰 (자작 시)

​ 미련한 곰 / 이 효 ​ 아침 산책길 나무 아래 널브러진 잣 껍질 사람들 발에 밟힌다 울음소리 등이 휜다 ​ 그 많던 잣은 어디로 갔을까? 텅 빈 잣 껍질 속 마른 새 울음소리 들린다 ​ 자식들 대학 간다고 전깃줄에 달 매달아 놓고 검정 눈알 하나씩 빼주었다 ​ 늦은 밤 가계부에 붉은 백일홍 만개한다 돋보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노망이 따로 없다 ​ 자식들은 알려나 남보다 한발 앞서라고 눈알이란 눈알 모두 빼주었는데~ ​ 수십 개의 눈알 옷에 달고도 길이 안 보인다 한다. 남은 껍질이라도 태워 길을 밝혀주어야 하나? ​ 세상 제일 미련한 동물이 노년에 동물원에 갇혔다 길을 잃어버렸다 ​ 동물원 팻말에 원산지는 미련한 곰이라 쓰여있다. ​

다육이 (자작 시)

다육이 / 이 효 꽃집 앞에 열 개의 입을 해죽 벌리고 웃고 있는 귀공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두 손으로 모셔왔다 뙤약볕 아래 게으른 내가 물을 가끔 주는데도 통통하게 살이 곱다 화려한 꽃들에 밀려 귀퉁이에 자리 잡은 너 키가 너무 작아 사람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녘 창가에 햇볕이 내리쬐면 통통한 엉덩이 들고 벌떡 일어난다 그럴 때는 꼭 나를 닮았다 상큼한 햇살로 몰래 보톡스 맞았는지 꽃도 아닌 것이 참 곱다 나도 너처럼 가을 햇살에 누워 공짜 보톡스 한 대 맞아야겠다.

첫사랑 (자작 시)

첫사랑 / 이 효 붉은 치마 입고 등불로 내게 온 당신 파란 하늘 등지고 쿵 쿵쿵 북채로 내 심장 울립니다 두 손위 노을 닮은 당신 마음으로 닦습니다 커다란 바구니에 탐욕을 담는 순간 날개를 잃었습니다 꽃 같은 그녀가 트럭에 실려가는 순간 쿵쿵 울리던 심장 소리 바퀴에 깔렸습니다 첫사랑은 내 등에 다리를 밟고 긴 강을 건넜습니다 달에 비친 붉은 얼굴 내 울음소리 녹습니다.

바다 (자작 시)

바다 / 이 효 보라빛 구름이 몰려온다 구름은 몸을 낮추어 바다의 울음소리 듣는다 너는 누군가의 아픈 소리 마음으로 들으려고 무릎 꿇어 본 적 있는가 흰머리 풀고 상모 돌리다 꽃가루같이 부서진 파도 젖은 마음 너럭바위에 넌다 구름은 멀리서 달려와 벗이 된다 파도가 구름이 되고 구름이 파도가 되는 순간 부서진 유리 같은 마음 바다 가운데 수정 길 낸다

꽃구경 가자 (자작 시)

꽃구경 가자 / 이 효 ​ 얘야 꽃이 피었구나 꽃구경 가자 ​ ​ 모두가 잠든 밤 당신 검게 그을린 폐 붉은 꽃 한 조각 펼쳐 놓고 가슴에 바느질하는 소리 딸에게 전화를 건다 ​ ​ 아버지 왜요? 새벽이잖아요 동트면 일나가야 해요 찰칵~ ​ ​ 얘야 꽃구경은 다리 힘없다 목소리가 듣고 싶구나 뚜뚜뚜~ ​ 당신은 그렇게 가셨습니다 꽃이 피면 미안했습니다 붉은 꽃이 피면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 ​ 멀리서 웃어 주시는 아버지 옷자락이 너무 얇아서 꽃무늬 가득한 가을 산자락 끌고 왔습니다.

무지개 (자작 시)

무지개 / 이 효 무지개를 본지 얼마만인가? 얼릴 적 비 그치면 등 뒤에 무지개 업고 놀았지 동무들 다 어디로 갔나? 무지개도 보이지 않네 쓸쓸한 마음에 흰머리만 솟네 비 그친 어느 날 꿈으로 다시 온 무지개 나뭇잎처럼 마음 흔들렸지 어릴 적 무지개 보고 소원 빌었지 착한 어른 되게 해달라고~ 나이 먹어 무지개 보고 소원을 빌었지 욕심 내려놓게 해달라고~ 비 그친 여름 날 하늘을 올려다보니 붉은 풍선만 한 내 욕심이 일곱 색깔 무지개로 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