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9 30

그만 내려놓으시오 / 공광규

그림 / 이율 그만 내려놓으시오 / 공광규 인생 상담을 하느라 스님과 마주 앉았는데 보이차를 따라놓고는 잔을 들고 있어 보라고 한다 작은 찻잔도 오래 들고 있으니 무겁다 그만 내려놓으시오 찻잔을 내려놓자 금세 팔이 시원해졌다 절간을 나와 화분에 담겨 시든 꽃을 매달고 있는 화초와 하수가 고여 썩은 개천을 지나오는데 꽃은 화려함을 땅에 내려놔야 열매를 얻고 물은 도랑을 버려야 강과 바다에 이른다는 말씀이 내 뒤를 따라온다 *공광규 시집 / 파주에게

잠 / 류시화

그림 / 박은영 잠 / 류시화 나를 치유해 준 것은 언제나 너였다 상처만이 장신구인 생으로부터 엉겅퀴 사랑으로부터 신이 내린 처방은 너였다 옆으로 돌아누운 너에게 눌린 내 귀, 세상의 소음을 잊고 두 개의 눈꺼풀에 입 맞춰 망각의 눈동자를 봉인하는 너, 잠이여 나는 다시 밤으로 돌아와 있다 밤에서 밤으로 부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얼굴의 윤곽을 소멸시키는 어둠 속으로 나라고 하는 타인은 불안한 예각을 가지고 있다 잠이 얕은 혼을 내가 숨을 곳은 언제나 너였다 가장 큰 형벌은 너 없이 지새는 밤 네가 베개를 뺄 때 나는 아직도 내가 깨어 있는 이곳이 낯설다 때로는 다음 생에 눈뜨게도 하는 너, 잠이여 * 류시화 제3시집 /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병 / 공광규

그림 / 이중섭 병 / 공광규 고산지대에서 짐을 나르는 야크는 삼천 미터 이하로 내려가면 오히려 시름시름 아프다고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동물 주변에도 시름시름 아픈 사람들이 많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파 죽음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직장도 잘 다니고 아부도 잘하고 돈벌이도 아직 무난하다 내가 병든 것이다 공광규 시집 / 파주에게

유리의 기술 / 정병근

그림 / 김환기 유리의 기술 /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끊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훤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시집 / 번개를 치다

살아 있는 것 아프다 / 류시화

그림 / 이진화 살아 있는 것 아프다 / 류시화 밤고양이가 나를 깨웠다 가을 장맛비 속에 귀뚜라미가 운다 살아 있는 것 다 아프다 다시 잠들었는데 꿈속에서 내가 죽었다 그날 밤 별똥별 하나가 내 심장에 박혀 나는 낯선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나는 알았다 그것이 시라는 것을 뉴시화 시집 /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행복 / 유치환

그림 / 박은영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각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붙이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 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치매-치매행 391 / 홍해리

그림 / 이중섭 치매-치매행 391 / 홍해리 이별은 연습을 해도 여전히 아프다 장애물 경주를 하듯 아내는 치매 계단을 껑충껑충 건너뛰었다 "네가 치매를 알아?" "네 아내가, 네 남편이, 네 어머니가, 너를 몰라본다면!" 의지가 없는 낙엽처럼 조붓한 방에 홀로 누워만 있는 아내 문을 박차고 막무가내 나가려고들 때는 얼마나 막막했던가 울어서 될 일 하나 없는데 왜 날마다 속울음 울어야 하나 연습을 하는 이별도 여전히 아프다 홍해리 시집 / 이별은 연습도 아프다

이별 / 괴테

그림 / 이신애 이별 / 괴테 이별의 말은 입이 아닌 눈으로 하리라. 견디기 어려운 이 쓰라림! 언제나 굳건히 살아왔건만. 달콤한 사랑의 징표도 헤어질 때는 슬픔이 되는 것을. 너의 키스는 차가워지고, 너의 손목은 힘이 없으니. 슬쩍 훔친 키스가 그때는 얼마나 황홀했던지! 이른 봄에 꺾었던 오랑캐꽃이 우리들의 기쁨이었던 것처럼 너를 위해 다시는 꽃도 장미도 꺾지 않으리. 프란치스카여, 지금은 봄이라지만 나는 쌀쌀한 가을 같구나. 괴태 시집 (송영택 옮김)

내 고향은요 / 지은경

그림 / 이왈종 내 고향은요 / 지은경 난, 고향이 어딘지 모릅니다 산이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바다라 기억되기도 합니다 풀꽃으로 태어난 나는 산에서 뿌리를 배우고 바다에서 하늘을 배웠습니다 해마다 수많은 풀꽃들은 꽃을 피워내며 민주주의를 노래 부릅니다 고향이 어디냐고 또 물으신다면 내 고향은 대한민국이요 지구촌이요 꽃 피울 수 있는 곳은 모두 고향입니다 지은경 한영 시선집 / 사람아 사랑아

카테고리 없음 2022.09.23

뭉크의 절규 / 천보숙

그림 / 조원자 뭉크의 절규 / 천보숙 길게 누운 핏빛 노을이 온 세상을 덮는다 해도 핏빛 노을에 젖은 바다가 다시 하늘로 용솟음친다 해도 무심한 사람들은 가던 길 그냥 가고 기괴한 모습의 사나이 대각선을 지르는 널다리 타고 끝없이 달려오는 공포를 온몸으로 휘감으며 절규를 토해낸다 세상에 덥친 이 거대한 공포 끝없는 고통과 절망을 좀 보라고 *저작권 관계로 뭉크 그림 올리지 못합니다. 천보숙 시집 / 명화를 시로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