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10 24

그림자 물풀 / 강은교

그림 / 신종식 그림자 물풀 / 강은교 눈물을 등불처럼 창밖에 걸어놓은 날 아주 긴 바람 소리 너를 찾아서 헤매고 있었어, 냉장고를 열어보고, 그릇 사이를 들여다보고, 벽 틈을 헤쳤지만 지나가는 구름까지도 들춰 보았지만, 너는 없었어, 그때 나는 보았어, 무엇인가가 문을 나서는 것을, 바로 너 였어, 지느러미를 훨훨 날리며, 문밖으로 유유히 나가는 것을, 없는 파도 속으로 깊이 깊이 몸을 감추는 것을, 물풀이 허리를 흔들며 너를 맞고 있었어, 퉁퉁 불은 너의 몸을, 열에 뜬 너의 몸을, 아, 글쎄 물풀이 그림자 물풀이, 강은교 시집 /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별똥별 / 정호승

그림 / 안려원 별똥별 / 정호승 나는 견인되었다 지구 밖으로 다른 사람보다 너무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돈도 못 벌면서 밥을 많이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화장실에 가서 남보다 똥을 많이 누었다는 이유만으로 지구 밖으로 견인되어 별똥별이 되었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 / 정호승

루마니아 풍습 / 황유원

그림 / 임이정 루마니아 풍습 / 황유원 루마니아 사람들은 죽기 전 누군가에게 이불과 베개와 담요를 물려준다고 한다 골고루 밴 살냄새로 푹 익어 가는 침구류 단단히 개어 놓고 조금 울다가 그대로 간다는 풍습 ​ 죽은 이의 침구류를 물려받은 사람은 팔자에 없던 불면까지 물려받게 된다고 한다 꼭 루마니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죽은 이가 꾸다 버리고 간 꿈 냄샐 맡다 보면 너무 커져 버린 이불을, 이내 감당할 수 없는 밤은 오고 이불 속에 불러들일 사람을 찾아 낯선 꿈 언저리를 간절히 떠돌게 된다는 소문 ​ 누구나 다 전생을 후생에 물려주고 가는 것이다 물려줘선 안 될 것까지 그러므로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이들 중 누군가는 분명 먼저 이불 속에 묻히고 이제는 몇 사람이나 품었을지 모를 거의 사람의 냄새가 풍기기 ..

단풍 / 박성우

그림 / 장근헌 단풍 / 박성우 ​ ​ 맑은 계곡으로 단풍이 진다 온몸에 수천 개의 입술을 숨기고도 사내 하나 유혹하지 못했을까 하루종일 거울 앞에 앉아 빨간 립스틱을 지우는 길손다방 늙은 여자 볼 밑으로 투명한 물이 흐른다 부르다 만 슬픈 노래를 마저 부르려는 듯 그 여자 반쯤 지워진 입술을 부르르 비튼다 세상이 서둘러 단풍들게 한 그 여자 지우다 만 입술을 깊은 계곡으로 떨굴다 박성우시집

고추밭 / 안도현

고추밭 / 안도현 어머니의 고추밭에 나가면 연한 손에 매운 물 든다 저리 가 있거라 나는 비탈진 황토밭 근방에서 맴맴 고추잠자리였다 어머니 어깨 위에 내리는 글썽거리는 햇살이었다 아들 넷만 나란히 보기 좋게 키워내셨으니 진무른 벌레 먹은 구멍 뚫린 고추 보고 누가 도현네 올 고추 농사 잘 안되었네요 해도 가을에 가봐야 알지요 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위하여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안도현 시집 / 서울로 가는 전봉준

개 좀 빌려 줘 봐 / 석민재

작품 / 전지연 개 좀 빌려 줘 봐 / 석민재 좋은 시절은 빨리 먹어버리자 태어나자마자 늙어버리자 해피, 해피, 해피만 부르는 아침에 맞을수록 웃는 개가 죽었지 어디까지가 입구고 어디부터가 출구야 사탄 같은 사탕을 물고 개 좀 빌려 줘 봐 낭비되는 개처럼, 노래 좀 불러 줘 봐 문 앞에서 노래 부르는 세상 모든 개를 압축하자 Rock Rock 개보다 가볍게 희희Rock Rock 춤이나 출까 심심한데 교회나 갈까 다시, 개 한마리 사겠다고 저 구멍을 통과해야 하나 개는 고기가 아니라서 나는 개도 아니면서 배는 고픈데 매일 걸작이 구워지는구나 족족 히트를 치는구나 석민재 시집 /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

10월 / 기형도

그림 / 안려원 10월 /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끔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

꽃밭을 바라보는 일 / 장석남

그림 / 백기륜 꽃밭을 바라보는 일 / 장석남 저 꽃밭에 스미는 바람으로 서걱이는 그늘로 편지글을 적었으면 함부로 멀리 가는 사랑을 했으면 그 바람으로 나는 레이스 달린 꿈도 꿀 수 있었으면 꽃속에 머무는 햇빛들로 가슴을 빚었으면 사랑의 밭은 처마를 이었으면 꽃의 향기랑은 몸을 섞으면서 그래 아직은 몸보단 영혼이 승한 나비였으면 내가 내 숨을 가만히 느껴 들으며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몸에,도망온 별 몇을 꼭 나처럼 가여워해 이내 숨겨주는 일같네 장석남 시집 / 꽃밭을 바라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