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11 23

나무 도마 / 신기섭

그림 / 김선기 나무 도마 / 신기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

문학이야기/명시 2022.11.29 (23)

물류 창고 / 이수명

그림 / 임영수 물류 창고 / 이수명 ​ ​ 우리는 물류 창고에서 만났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 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 버렸지 ​ 물건들은 널리 알려졌지 판매는 끊임없이 증가했지 창고 안에서 우리들은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돌아오곤 했지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했어 ​ 무얼 끌어내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담당자처럼 걸어 다녔지 바지 주머니엔 볼펜과 폰이 꽂혀 있었고 전화를 받느라 구석에 서 있곤 했는데 그런 땐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 ​ 물건의 전개는 여러모로 훌륭했는데 물건은 많은 종류가 있고 집합되어 있고 물건 찾는 방법을 몰라 닥치는 대로 물건에 손대는 우리의 전진도 훌륭하고..

문학이야기/명시 2022.11.27 (11)

화사花蛇 /서정주

그림 / 김정래 화사花蛇 /서정주 ​ ​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 꽃다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눌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무러뜯어,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 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석유石油 먹은듯…석유石油 먹은듯…가쁜 숨결이야 ​ 바눌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베암. ​ 우리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여라! 베암. 서정주 시집 / 화..

문학이야기/명시 2022.11.23 (40)

물의 온도 / 장혜령

그림 / 이율 물의 온도 / 장혜령 바람이 지난 후의 겨울 숲은 고요하다 수의를 입은 눈보라 물가에는 종료나무 어두운 잎사귀들 가지마다 죽음이 손금처럼 얽혀 있는 한 사랑이 지나간 다음의 세계처럼 이 고요 속에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초록이 초록을 풍경이 색채를 간밤 온 비로 얼음이 물소리를 오래 앓고 빛 드는 쪽으로 엎드려 잠들어 있을 때 이른 아침 맑아진 이마를 짚어보고 떠나는 한 사람 종소리처럼 빛이 번져가고 본 적 없는 이를 사랑하듯이 깨어나 물은 흐르기 시작한다 장혜령 시집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장혜령 시집)

문학이야기/명시 2022.11.22 (14)

나무 생각 / 안도현

그림 / 김순영 나무 생각 / 안도현 나보다 오래 살아온 느티나무 아래서는 무조건 무릎 끓고 한 수 배우고 싶다 복숭아나무가 복사꽃 흩뿌리며 물 위에 점점이 우표를 붙이는 날은 나도 양면괘지에다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에 기를 쓰고 붙어 있는, 허리 뒤틀린 조선소나무를 보면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주고 싶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멀리 보내는 밤나무 아래에서는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나도 관계를 맺고 싶다 나 외로운 날은 외변산 호랑가시나무 숲에 들어 호랑가시나무한테 내 등 좀 긁어달라고, 엎드려 상처받고 싶다 안도현 시집 /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문학이야기/명시 2022.11.21 (19)

황태마을 덕장에서 / 권수진

그림 / 송지윤 황태마을 덕장에서 / 권수진 눈 덮인 진부령 고갯길 너머 용대리 황태마을 덕장 안 명태들이 피아노 건반처럼 매달려 있다 시베리아 북서풍에 맞서 두 눈을 부릅뜬 채 아가리 크게 벌려 목청을 가다듬는 명태 두름 매서운 바람이 누르는 건반 소리에 박자를 맞춰 허공을 향해 일제히 트위스트 춤을 춘다 추위를 즐기는 명태들의 모습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등록금 천만 원 시대를 살아가는 힘겨운 세상 밤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우리들에게 따뜻한 해장국 한 그릇이 되고 싶었다던 아버지 우리는 그의 몸뚱이를 발기발기 찢어서 뜨거운 김 모락모락 피어나는 국물을 훌훌 마시며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눈발이 휘날리는 덕장 건조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런 빛깔로 맛깔스레 익어가는 아버지가 걸려 있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11.20 (22)

11월의 노래 / 김용택

그림 / 조은희 11월의 노래 / 김용택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납니다 ​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로움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와 닿습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납니다 김용택 시집 / 그대, 거침없는 사랑

문학이야기/명시 2022.11.19 (17)

하모니카 부는 오빠 / 문정

그림 / 정전옥 하모니카 부는 오빠 / 문정 오빠의 자취방 앞에는 내 앞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사철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아래에는 평상이 있고 평상 위에서는 오빠가 가끔 혼자 하모니카를 불죠 나는 비행기의 창문들을 생각하죠, 하모니카의 구멍들마다에는 설레는 숨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이륙하듯 검붉은 입술로 오빠가 하모니카를 불면 내 심장은 빠개질 듯 붉어지죠 그때마다 나는 캄보디아를 생각하죠 양은 밥그릇처럼 쪼그라들었다 죽 펴지는 듯한 캄보디아 지도를 생각하죠, 멀어서 작고 붉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오빠는 하모니카를 불다가 난기류에 발목 잡힌 비행기처럼 덜컹거리는 발음으로 말해주었지요, 태어난 고향에 대해, 그곳 야자수 잎사귀에 쌓이는 기다란 달빛에 대해, 스퉁트랭, 캄퐁참, 콩퐁솜 등 울퉁불퉁 돋아..

문학이야기/명시 2022.11.18 (10)

매듭 / 장흥진

그림 / 정미경 매듭 / 장흥진 택배로 온 상자의 매듭이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방식으로 단단히 묶인 끈 보다못한 아이가 칼을 건넨다 늘 지름길을 지향하는 칼 좌석표가 있다는데 일부러 입석표를 끊어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서서 가시며 그 근소한 차액을 남기시던 어머니는 평생 지름길을 모르는 분이었다 상자속엔 가을걷이한 곡식과 채소가 들어있을 것이다 꾹꾹 눌러도 넘치기만 할 뿐 말끔히 닫히지 않는 상자를 가로 세로 수십 번 이 비닐끈으로 동여 매셨을 어머니의 뭉툭한 손마디가 떠올라 칼을 가만히 내려 놓는다 힘이 들수록 오래 기도하시던 어머니처럼 무릎을 꿇고 밤이 이슥해지도록 상자의 매듭과 대결한다 이는 어쩌면 굽이진 어머니의 길로 들어가 아득히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린 날에는 이..

문학이야기/명시 2022.11.1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