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황태마을 덕장에서 / 권수진

푸른 언덕 2022. 11. 20. 15:33

 

그림 / 송지윤

 

 

 

 

황태마을 덕장에서 / 권수진

 

<제24회 박인환 추모백일장 차상>

 

 

눈 덮인 진부령 고갯길 너머 용대리 황태마을

덕장 안 명태들이 피아노 건반처럼 매달려 있다

시베리아 북서풍에 맞서 두 눈을 부릅뜬 채

아가리 크게 벌려 목청을 가다듬는 명태 두름

매서운 바람이 누르는 건반 소리에 박자를 맞춰

허공을 향해 일제히 트위스트 춤을 춘다

추위를 즐기는 명태들의 모습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등록금 천만 원 시대를 살아가는 힘겨운 세상

밤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우리들에게

따뜻한 해장국 한 그릇이 되고 싶었다던 아버지

우리는 그의 몸뚱이를 발기발기 찢어서

뜨거운 김 모락모락 피어나는 국물을 훌훌 마시며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눈발이 휘날리는 덕장 건조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런 빛깔로 맛깔스레 익어가는 아버지가 걸려 있다

몸피를 잃을수록 구수한 맛이 베어나는 황태처럼

젊은 날 자식들 위해 오장육부를 다 뜯어내고

요양병원 병상에 누워 비쩍비쩍 말라가는 몸

곤히 잠든 아버지의 퇴화된 지느러미를 조심스레 만져본다

아버지 오늘도 동해의 거친 물살을 가로지르며

마음껏 바다를 유영하던 시절의 꿈을 꾼다

 

 

 

 

 

 

 

 

 

 

 

'문학이야기 > 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의 온도 / 장혜령  (14) 2022.11.22
나무 생각 / 안도현  (19) 2022.11.21
11월의 노래 / 김용택  (17) 2022.11.19
하모니카 부는 오빠 / 문정  (10) 2022.11.18
매듭 / 장흥진  (5) 2022.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