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하모니카 부는 오빠 / 문정

푸른 언덕 2022. 11. 18. 17:25

 

그림 / 정전옥

 

 

 

 

하모니카 부는 오빠 / 문정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오빠의 자취방 앞에는 내 앞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사철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아래에는 평상이 있고 평상 위에서는 오빠가

가끔 혼자 하모니카를 불죠

나는 비행기의 창문들을 생각하죠, 하모니카의 구멍들마다에는

설레는 숨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이륙하듯 검붉은 입술로 오빠가 하모니카를 불면

내 심장은 빠개질 듯 붉어지죠

그때마다 나는 캄보디아를 생각하죠

양은 밥그릇처럼 쪼그라들었다 죽 펴지는 듯한

캄보디아 지도를 생각하죠, 멀어서 작고

붉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오빠는 하모니카를 불다가

난기류에 발목 잡힌 비행기처럼 덜컹거리는 발음으로

말해주었지요, 태어난 고향에 대해,

그곳 야자수 잎사귀에 쌓이는 기다란 달빛에 대해,

스퉁트랭, 캄퐁참, 콩퐁솜 등 울퉁불퉁 돋아나는 지명에 대해,

오빠의 등에 삐뚤빼뚤 눈초리와 입술들을

붙여놓은 담장 안쪽 사람들은 모르죠

오빠의 하모니카 소리가 바람처럼

나를 훅 뚫고 지나간다는 것도 모르죠

검은 줄무늬 교복치마가 펄렁, 하고 젖혀지는 것도

영원히 나 혼자만 알죠

하모니카 소리가 새어나오는

그 구멍들 속으로 시집가고 싶은 별들이

밤이면 우리 집 평상 위에 뜨죠

오빠가 공장에서 철야작업 하는 동안

별들도 나처럼 자지 않고 그냥 철야를 하죠

 

 

*캄보디아에서온 한 노동자의 이야기다

현실적인 고통을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않고도

고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시

 

 

 

*문정시인 유고집 / 하모니카 부는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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