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매듭 / 장흥진

푸른 언덕 2022. 11. 18. 09:40

 

그림 / 정미경

 

 

 

매듭 / 장흥진

 

<제6회 시흥 문학상 대상>

 

 

 

택배로 온 상자의 매듭이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방식으로 단단히 묶인 끈

보다못한 아이가 칼을 건넨다

 

늘 지름길을 지향하는 칼

좌석표가 있다는데 일부러 입석표를 끊어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서서 가시며

그 근소한 차액을 남기시던

어머니는 평생 지름길을 모르는 분이었다

 

상자속엔 가을걷이한 곡식과 채소가 들어있을 것이다

꾹꾹 눌러도 넘치기만 할 뿐 말끔히 닫히지 않는 상자를

가로 세로 수십 번 이 비닐끈으로 동여 매셨을

어머니의 뭉툭한 손마디가 떠올라

칼을 가만히 내려 놓는다

 

힘이 들수록 오래 기도하시던 어머니처럼

무릎을 꿇고

밤이 이슥해지도록 상자의 매듭과 대결한다

이는 어쩌면 굽이진 어머니의 길로 들어가

아득히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린 날에는 이해되지 않던 험한 길 굽이마다

붉게 저녁 노을로 걸린 어머니의 생애

옹이진 어머니의 매듭 같던 암호는

난해하지 않았다

 

차근 차근 풀어내고 보니

이음새도 없이 어머니의 길은 길고 부드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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