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 / 정경이

푸른 언덕 2022. 11. 15. 18:29

그림 / 정진경

 

 

<2001년 전남일보> 신춘당선작

 

 

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 / 정경이

 

우항리에서

 

 

그곳에 가면 싱싱한 그리움의 지느러미를 달고 있는 발자국을 신어 볼 수 있다 따뜻한 햇살이 발등을 콕콕 쪼는 해변을 따라 달려

가다 보면 손톱만한 꽃들이 까르르르 하얀 웃음 흩뿌리고 갈대들이 뒷걸음질치며 다정하게 손 흔드는 호숫가, 생기 넘치는 풍경

들은 여러 장의 궁금증을 복사한다 궁금증을 살짝 들추면 잔물결이 발을 간지럽히는데도 웃음을 참고 발자국 걸어나온다 그런데

누가 저렇게 헐렁한 신발을 신고 다녔을까

바위에 박힌 발자국은 서로 부서지지 않기 위해 촘촘히 껴안고 있다 1억년이 넘도록 흐트러 지지 않은 발자국의 깊이만큼 두꺼운

사랑, 껴안고 돌이 된 채로 백열등 만한 심장을 찾아 환하게 불 밝히고 있을 심장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때론 누울 곳 없는 정

신 툭하면 집을 나갔을 것이고. 발자국은 그렇게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고 바위가 되고 다시 길이 되어 1억년 밖으로 나섰는데 생

각해보면 나는 참 어수선한 길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화석처럼 박힌 관습의 발자국들을 정신없이 좇아 다녔을 뿐

슬그머니 신발을 벗고 발자국 신어 본다 지금껏 내 발등을 밟고 있던 발자국 하나 얼른 벗어 놓고 도망치듯 빠져나오는데 깨금발

로 따라오는 커다란 발자국 나도 깨금발로 걷고 있다 우항리를 벗어 날 때쯤 나의 걸음은 경쾌하고 길도 신발을 신고 내 팔짱을

낀다

 

 

*우항리 / 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 공룡발자국화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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