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물 위에 쓴 시 / 정호승

그림 / 황 순 규 ​ ​ ​ 물 위에 쓴 시 / 정호승​ ​ ​내 천 개의 손 중 단 하나의 손만이 그대의 눈물을 닦아주다가 내 천 개의 눈 중 단 하나의 눈만이 그대를 위해 눈물을 흘리다가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하여 길이 없는 밤은 너무 깊어 달빛이 시퍼렇게 칼을 갈아 가지고 달려와 날카롭게 내 심장을 찔러 이제는 내 천 개의 손이 그대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내 천개의 눈이 그대를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 ​​ ​ 정호승 시선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 ​ ​

명시 2023.01.27 27

눈물이 시킨 일 / 나호열

그림 / 장주원 ​ ​ ​ 눈물이 시킨 일 / 나호열 ​ ​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 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꺼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 ​ ​ 나호열 시집 / 바람과 놀다 ​ ​ ​ ​ ​

명시 2023.01.25 27

봄비는 가슴에 내리고 / 목필균

그림 / 이영학 ​ ​ ​ ​ 봄비는 가슴에 내리고 / 목필균​ ​ ​ 그대가 보낸 편지로 겨우내 마른 가슴이 젖어든다 ​ 봉긋이 피어오른 꽃눈 속에 눈물이 스며들어, 아픈 사랑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겨울 일기장 덮으며 흥건하게 적신 목련나무 환하게 꽃등 켜라고 온종일 봄비가 내린다 ​ ​ ​ 詩 전문 ​ ​ ​

명시 2023.01.24 27

​번역자 / 장혜령

그림 / 조대현 ​ ​ ​ ​ 번역자 / 장혜령​ ​ ​ ​ 이 숲에는 먼 나무가 있다 흑송이 있고 물푸레나무가 있다 ​ 가시 사이로 새어드는 저녁 빛이 있고 그 빛에 잘 닦인 잎사귀가 있다 ​ 온종일 빛이 닿은 적 없는 내부에 단 한 순간 붉게 젖어드는 것이 슬픔처럼 가만히 스며드는 것이 있다 ​ 저녁의 빛은 숲 그늘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다 ​ 그 속에 새 그림자 하나 ​ 날개짓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 비릿한 풀냄새가 난다 불타버린 누군가의 혼처럼 ​ 이 시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이곳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 꿈속에서 물위에서 나를 적는 사람 ​ 흔들리면서 내게 자꾸 편지를 보내는 사람 ​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 ​ ​ ​ 장혜령 시집 ..

명시 2023.01.23 21

소리를 꿰매는 법 / 이 효

그 림 / 송인관 ​ ​ ​ 소리를 꿰매는 법 / 이 효 ​ ​ 겨울바람이 쿨럭이면 트고 갈라진 입술을 비좁은 창문 틈에 대고서 달동네는 밤새 휘파람을 불었다 손수레에 쪽방을 끌고 가는 노파 고물상으로 가는 길, 바퀴 터지는 소리 사이로 지난겨울 맹장 터진 어린 손주의 비명이 걸어 나온다 어미는 어디로 갔는지 성냥갑 닮은 쪽방에 아이 하나 촛농처럼 식어간다 자원봉사자들 연탄 나르던 비탈진 골목길 재개발 소식에 이웃들 불꽃 꺼지듯 사라지고 반쯤 열린 대문 앞 빨간 고무대야 속에는 지난여름을 박제시킨 꽃들이 떠난 이웃의 말라버린 이름을 솎아낸다 이른 새벽에 파지 줍는 세월은 바늘귀에 침묵을 꿰어 기울어가는 생을 덧대는 일이다 조각보처럼 이어온 날짜들이 노파의 입가에 주름처럼 세 들어 산다 당고개역 잡화가게 ..

자작시 2023.01.20 21

2023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림 / 후후 ​ ​ 버터 /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명시 2023.01.19 28

물의 언어 / 장혜령

그림 / 박정심 ​ ​ ​ 물의 언어 / 장혜령 ​ ​ 바람이 지난 후의 겨울 숲은 고요하다 ​ 수의를 입은 눈보라 ​ 물가에는 종료나무 어두운 잎사귀들 ​ 가지마다 죽음이 손금처럼 얽혀 있는 ​ 한 사랑이 지나간 다음의 세계처럼 ​ 이 고요 속에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 초록이 초록을 ​ 풍경이 색채를 ​ 간밤 온 비로 얼음이 물소리를 오래 앓고 ​ 빛 드는 쪽으로 엎드려 잠들어 있을 때 ​ 이른 아침 맑아진 이마를 짚어보고 떠나는 한 사람 ​ 종소리처럼 빛이 번져가고 ​ 본 적 없는 이를 사랑하듯이 ​ 깨어나 물은 흐르기 시작한다 ​ ​ ​ 장혜령 시집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 ​ ​​ ​

명시 2023.01.18 30

멜로 영화 / 이진우

그림 / 조규일 멜로 영화 / 이진우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 적도 없는 관..

명시 2023.01.17 24

목계장터 / 신경림

그림 / 이미화 ​ ​ ​ 목계장터 / 신경림 ​ ​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울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라 짠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 ​ *충북 충주 부근 남한강변 어디쯤 목계나루란 나루가 있고 거기에 "목계장터"란 시비가 있다고 들었다. 그 고장이 고향인 신경림 ..

명시 2023.01.16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