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202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푸른 언덕 2026. 2. 3. 06:11

202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졸업반 / 김남주


우리는 술에 취해 무궁화
무궁화 흙바닥에 선을 죽 그어놓고

꽃이 피었습니다

내가 술래,
무궁화는커녕 나무 하나 없는 운동장에서

너희들은 내게 다가온다 한 발 두 발
시치미를 떼며

나는 노래를 부른다 전주도 후렴도 없는 첫 소절이 마지막 소절인

그러니까 반복해서 불러야 해 노래가 끝나지 않도록
놀이가 끝나지 않도록 한 소절이 노래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노래보다는 구호에 가까운 한 문장을

우리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집 안에는 우리가 없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뒤의 인기척
무엇인가 오고 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끊어지는 서늘함

우리들은 달린다
우리가 그어놓은 출발선을 향해

저기서부터 출발이야,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울지 마 울지 마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모두 혼내주자
그게 설령 우리를 낳아준 사람이라도

이 도시는 깨끗해서 외롭고
무엇인가 오고 있어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재난 경보 문자들
일기예보처럼 읽어내는 재난 말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선명해지는
나를 웃기기 위한 해괴한 표정과 자세 말고

뒷덜미에 울리는 숨소리
과장된 웃음소리

오고 있어,
무궁하고 무진한 꽃 같은 것들이


김남주 / 1995년생, 계명대 문예창작과 졸업 , 명지대 문예창작과 석사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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