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하루 시 필사

피가 피다 / 김혜순

푸른 언덕 2026. 2. 17. 10:36


그림 / 박정자



피가 피다 / 김혜순


재봉틀 바늘처럼 따라오는 빗줄기를 피해 달아나다가

모퉁이 돌아 몸속에서 붉은 벽돌을 꺼내 담 쌓아가다가

가로등이 따끔따끔 켜지며 쫓아오면 더 힘껏 달아나다가

마음 급한 매미들이 길을 썰어대는 소리 귀 기울여 듣다가

발목에 쥐날 때처럼 저 멀리 빌딩의 창문들이 환하게 켜지면

빨간 콧구멍 흰 고양이가 담장 밑으로 코피를 떨어뜨리는 것 바라보다가

광목 한 필 펼친 것 같은 희디흰 담장에 빨갛게 맺히다가

바늘이 몸 안으로 들어갔다가 실핏줄을 끌고 다시 나오면

혈관이 부풀어 솟구치고 한 송이 두 송이 참지 못하다가

땀구멍마다 앗 따가 앗 따가 가시가 따라 나오다가

흰 고양이의 입속에 머리를 빼앗긴 어린 새 한 마리
내 손에 들린 작고 붉은 심장이 푸드덕거리다가

앞길이 구만리 장미꽃 밭이구나 하더니
피 맺힌 줄기를 떨치며 달아나다 그만 잡혔구나
몇백 년 만에 몇천 년 만에 겨우 한 번 맺혔더니
흰 양말 신고 내디딘 붉은 주단이 피 웅덩이로구나
한 세월 수혈하다 한없이 어지러워
모퉁이 돌아 사라져 가는구나
매일매일 붉게 솟구치더니 새파랗게 질려 가는구나

-장미꽃 피는 줄 알았더니
피 쏟다 갔구나  


김혜순 시집 / 슬픔치약 거울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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