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12 33

겨울 자연 / 이근배

그림 / 소순희 겨울 자연 / 이근배 나의 자정에도 너는 깨어서 운다 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 들은 끝없는 눈발 속을 헤맨다 나의 풀과 나무는 어디 갔느냐 해체되지 않은 영원 떠다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 나의 자정을 부르느냐 따순 피로 돌던 사랑 하나가 광막한 자연이 되기까지는 자연이 되어 나를 부르기까지는 너의 무광의 죽음 구름이거나 그 이전의 쓸쓸한 유폐 허나 세상을 깨우고 있는 꿈속에서도 들리는 저 소리는 산이 산이 아닌, 들이 들이 아닌 모두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쁨 같은 울음이 달려드는 것이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역임 *경향, 서울, 조선, 동아, 한국일보 신춘문예 5관왕 *시집 외

새해가 내려요 / 이 효

그림 / 이 봉 화 새해가 내려요 / 이 효 꿈틀거리는 지난 시간의 내장들 끊어진 소통 위로 눈이 내린다 방전된 몸으로 새해를 넘어온 사람들 아픈 손톱에 첫눈을 발라준다 뾰얀 속살이 차곡 쌓인 달력을 단다 말풍선에 매달란 섬들이 소통하고 유리벽을 타는 용서가 녹아내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가 찰칵 찍어 놓은, 첫눈 오는 날 핸드폰 속에서 풍겨오는 사람 내음 눈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그렁한 눈발로 묻는다 까똑 까똑 까똑 *신문예 1월의 시 / 이 효

고향에 핀 도라지꽃 / 이 효

그림 / 김정수 고향에 핀 도라지꽃 / 이 효 밥상에 오른 도라지나물 고향 생각난다 할머니 장독대 도라지꽃 어린 손녀 잔기침 소리 배를 품은 도라지 속살 달빛으로 달여 주셨지 세월이 흘러 삐걱거리는 구두를 신은 하루 생각나는 고향의 보랏빛 꿈 풍선처럼 부푼 봉오리 두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면 펑하고 터졌지 멀리서 들리는 할머니 목소리 애야, 꽃봉오리 누르지 마라 누군가 아프다 아침 밥상에 도라지나물 고향 생각하면 쌉쏘름하다 이효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울음이 타는 가을江 / 박재삼

그림 / 후후 울음이 타는 가을江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에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것네. 저것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것네. 시집 / 시가 내게로 왔다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그림 / 박명애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입맞춤을 연습해 본 적이 없어 광신도가 춤을 추던 그날 밤 생명이 자궁에 바늘처럼 꽂혔지 아빠라는 단어를 사막에 버린 남자 무표정한 가을이 오고, 혈액형을 쪼아대는 새들 끊어진 전선으로 반복된 하루 딱 한 번의 입맞춤 눈빛이 큰 불을 지핀 거야 모든 삶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 매일 밤, 암막 커튼을 치고 바다로 가는 꿈을 꿔 나쁜 생각들이 골수를 빼먹어 아비도 없는 애를 왜 낳으려고 하니? 이름도 모르는 신에게 아가 울음을 택배로 보낼 수 없잖아 나는 썩지 않는 그림자니까 어느 날, 종소리가 달팽이관을 뚫고 아기 숨소리 깃털이 된다 생명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거래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세상에 두 번째 입맞춤을 알릴 거야 그건 슬픔이 아닌, 정오의 입맞춤 이효 ..

꿈의 방정식 / 이 효

그림 / 성기혁 꿈의 방정식 / 이 효 지게 위 비단 날개 살포시 올라간다 하늘을 날겠다는 소녀는 백 년 전에 하늘길을 묻는다 작대기 끝처럼 불안한 나라 책보따리 가슴에 둘러매고 동해를 건너 낯선 땅에 선다 조국을 잃은 분노의 질주일까 운명처럼 남자를 품은 죄일까 뒷바퀴가 빠져버린 여자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 천둥 번개 하늘이 말리더니 서른세 살, 푸른 날개 현해탄에서 물거품이 된다 날아야지, 날아야지, 여류 비행사의 부서진 꿈 그녀의 절규는 수직으로 다시 오른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지로용지 커피에 빠진 날 / 이 효

그림 / 남궁원 지로용지 커피에 빠진 날 / 이 효 할머니가 내민 지로용지 사기꾼에게 약 같지 않은 약 몇 배나 비싸게 샀다고 목청을 높이는 아버지 이 정도 약도 못 먹을 팔자냐 니그들이 애미 힘든 거 알아주냐 배꼽 잡게 웃겨주냐 사근사근 총각들이 효자지 종일 어깨 주물러주지 온갖 재롱 다 떨어주지 찌글퉁 얼굴 주름 다 펴주지 내 자슥들보다 낫다 뭐든 팔아 주는 게 도리여 할머니 목청 문지방에 걸리고 커피 맹키로 어두워진 얼굴 지로용지가 커피에 빠진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숟가락을 놓다 / 이 효

그림 / 후후 숟가락을 놓다 / 이 효 ​낡은 부엌문 바람이 두들기는데 빈 그릇에 바람 소리 말을 더듬고 장작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둥근 밥상에 수저 두 개 올려놓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굽는다 할머니 나물 팔던 손으로 부엌문 활짝 열어 놓았다 ​ 바람은 잠시 단추를 채우고 나간다 그림자 된 춥고 외로운 사람들 쓰러진 술병처럼 몸이 얼었다 녹는다 산산이 발려진 생선 가시의 잔해들 ​무표정한 가시를 모아 땅에 묻는다 상처 난 것들 위로 첫눈이 내린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부엌에 온기를 넣는 것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詩, 시시한 별 / 이 효

그림 / 허경애 詩, 시시한 별 / 이 효 별을 따다 준다는 남자와 별을 따다 줄 수 없다는 남자가 결혼을 하자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남자를 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별을 따다 줄 수 없다는 남자랑 결혼했다 베개를 함께 베고 자는 남자의 속삭임 별을 따다 주겠다는 남자는 사기꾼이야 세월이 흘러, 여자는 하늘의 별 대신 방구석 개미들을 세기 시작한다 남자가 별을 따다 줄 수 없다면 내가 하늘에 사다리를 놓아야겠지 개미들은 줄 서서 하늘로 올라간다 詩, 시시한 별 한 바구니 신맛을 본 촌스러운 여자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