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12 33

얘야, 고삐를 놓아라

그림 / 이연숙 얘야, 고삐를 놓아라 소들이 풀을 뜯는다 서산에 떨어지는 붉은 혓바닥 소꼬리 끝에서 일렁이는 구름들 붉은 노을에 놀란 소 일 획을 그으며 언덕을 내달린다 소는 아버지의 유일한 재산 소년은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바닥 맨땅에 끌려간다 바지 구멍에 흐르는 핏빛 멀리서 들리는 떨리는 음성 얘야, 고삐를 놓아라 그래야 산다 명퇴, 힘들면 아이들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라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한울*강 / 이 효

그림 / 조 규 석 한울*강 / 이 효 그대가 그리운 날에는 바람 부는 강가에 서서 아득히 먼 산을 바라봅니다 오랜 세월 내 안에 가둬두었던 당신을 떠나보냅니다 그대가 생각나는 날에는 강가에 핀 유채꽃 사이로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봅니다 나뭇잎이 빗물에 씻기듯 마음에서 그대를 떠나보냅니다 인생은 강 건너 보이는 흐린 산 같은 것 푸른 것들이 점점 사라지는 눈물 그대는 먼 산으로 나는 강물로 왔다가 깊이 끌어안고 가는 묵언의 포옹 *한울 / 큰 울타리처럼 사람들을 포근하게 안아주어라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맨발 기차 / 이 효

그림 / 민병각 맨발 기차 / 이 효 동네에 휘어진 기차가 있다 빗물로 녹슨 선로 위에서 아이들은 외발 놀이 가위, 바위, 보 표정 없는 마네킹처럼 넘어가는 해 종착역의 꺼진 불빛은 눈알 빠진 인형 정거장이 사라진 태엽 풀린 기차 멈춰버린 음악, 깨진 유리창 구겨진 몸통은 달리고 싶은데 바퀴는 목발을 짚고 절뚝거린다 해는 떨어졌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맨발로 버티는 기차는 바람이 불어도 떠나는 아이들 목소리 잡지 못한다 철커덩, 청춘이 떠난 차가운 선로 위 여분의 숨결이 쌕쌕거린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신지도 / 이 효

그 림 / 황 순 규 신지도 / 이 효 뜨거운 여름, 섬 하나 두 다리를 오므리고 누운 모습 생명을 품은 여인의 몸 젖가슴 갈라지더니 해가 오른다 얼마나 간절히 소망했던 생명인가 터트린 양수는 남해를 가득 채운다 철썩거리는 분침 소리 새벽 진통을 마치고 고요하다 하늘 자궁문이 열린 자리에는 수만 송이의 동백꽃이 피어오른다 수평선 위 작은 섬 하나 한여름 꿈이 환하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사과를 인쇄하다 / 이 효

그림 / 김옥석 사과를 인쇄하다 / 이 효 주왕산 병풍 아래 사과밭이 엄마 품만하다 대전사 종소리 붉다 가을 찬바람에 어쩌자고 사과는 뒹구는지 노모의 사과, 가득 싣고 서울로 올라온다 접시에 올려놓은 사과 눈 맞춘다 자를까 말까 상처받는 내 모습 같아 깨물지도 자르지도 못하고 가슴에 안고 인쇄를 한다 가을은 퍼렇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이재호 갤러리

항아리 / 이 효

그림 / 김정수 항아리 / 이 효 손길 닿지 않는 대들보에 항아리를 거신 아버지 까막눈 파지 줍는 아저씨 은행에 돈 맡길 줄 몰라 아버지께 당신을 건넨다 아버지 세상 떠나기 전 항아리 속에 꼬깃꼬깃한 돈 아저씨에게 쥐어준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 긴 겨울이 꼬리 잘리고 다시 찾아온 가을 검정 비닐 들고 온 아저씨 홀로 계신 어머니께 두 손 내민다 비닐 속에는 붉게 터져버린 감이 벌겋게 들어앉아 울고 있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그, 날 / 이 효

그림 / 김 연경 그, 날 / 이 효 ​ 흰 눈이 쌓인 산골짝 한 사내의 울음소리가 계곡을 떠나 먼바다로 가는 물소리 같다 ​하늘 향해 날개를 폈던 푸른 나뭇잎들 떨어지는 것도 한순간 이유도 모른 채 목이 잘린 직장 ​어린 자식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 하얀 눈발에 내려갈 길이 까마득하다 ​ 어머니 같은 계곡물이 어여 내려가거라 하얀 눈 위에 길을 내어주신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달걀부침과 미스코리아 / 이 효

그림 / 이기호 달걀부침과 미스코리아 / 이 효 어린 딸내미 밥 수저 위에 올려주던 노란 달걀부침 볼은 주먹만 한 풍선 꼭꼭 씹어라 하나 둘 셋··· 서른 꿀꺽 아이고 우리 딸 미스코리아 되겠네 어른이 되어서 노란 꽃밭이 되라는 아버지 말씀 프라이팬 위에서 자글거린다 나는 왜, 아직도 미스코리아가 되지 못했나 볼에 노른자 주룩 흐른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