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12 33

바늘귀 / 이 효

그림 / 문미란 바늘귀 / 이 효 이불 꿰매는 엄마 바늘귀에 실은 혀끝을 더듬는다 엿가락 뽑듯 길게 당긴 늘어진 오후 요년, 시집 멀리 갈래 엄마, 실을 길게 꿰면 새들이 수평선 넘어가 싫어, 소라와 게처럼 살래 대답은 빨랫줄에서 웃는다 햇살이 싹둑 잘린 오후 줄에 풀 먹인 유년이 펄럭인다 짧은 눈썹 같은 대답이 유순해진다 그녀는 구름 위에 신방을 꾸민다 그날 이후 딸년의 낭창거리는 목소리 들리지 않는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나침반 / 이효

그림 / 송민자 나침반 / 이효 푸르릉거리는 나비 한 마리 아버지 배낭 안에서 찾는 길 더덕이랑, 쑥이랑, 곰취랑 산등성에 봄내음 캔다 아버지 실웃음 링거에 걸고 하얀 꽃잎 위에 누운 날 이 빠진 풍금 소리 딸내미 가슴 음표 없는 울음 아버지의 배낭 속 지구만 한 나침반 숲에서 길을 잃은 발자국 소리가 절벽에 매달릴 때 초침 같은 남자의 미소 아버지 얼굴에 앉은 나비 나침반 위에 옮겨 앉으면 그 자리에 숲길이 환하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당신의 숨 한 번 / 이 효

해설 ‘숨’과 ‘쉼’의 풍경을 읽다 나호열 (시인 · 문학 평론가)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보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기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며, 또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기적奇跡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인과의 법칙을 넘어서서 이루어지는 것, 어떤 절망적 상황이 순식간에 극복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기적이 필요하지 않은 평온한 삶이다. 기적이 요구되지 않는 삶, 언제든 쉬고 잠잘 수 있는 집이 있고, 언제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넉넉한 양식糧食이 비축되어 있는, 어찌 보면 판에 박힌 쳇바퀴를 돌리는 삶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

계산동 성당 / 황유원

그림 / 장정화 계산동 성당 / 황유원 요즘엔 침묵만 기르다 보니 걸음까지 무거워졌지 뭡니까 한 걸음 한 걸음 지날 때마다 거기 벽돌이 놓여 뭐가 지어지고 있긴 한데 돌아보면 그게 다 침묵인지라 아무 대답도 듣진 못하겠지요 계산 성당이 따뜻해 보인다곤 해도 들어가 기도하다 잠들면 추워서 금방 깨게 되지 않던가요 단풍 예쁘게 든 색이라지만 손으로 만져도 바스라지진 않더군요 여린 기도로 벽돌을 깨뜨릴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옛 사제관 모형은 문이 죄다 굳게 닫혀 있고 모형 사제관 안에 들어가 문 다 닫아버리고 닫는 김에 말문까지 닫아버리고 이제 그만 침묵이나 됐음 하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의 무게는 차라리 모르시는 게 낫겠지요 너무 새겨듣진 마세요 요즘엔 침묵만 기르다 보니 다들 입만 열면 헛소리라 하더군..

늙어가는 첫사랑 애인에게 / 최금진

그림 / 한영숙 늙어가는 첫사랑 애인에게 / 최금진 주인 없는 황량한 뜰에서 아그배나무 열매들은 저절로 떨어지고 내가 만든 편견이 각질처럼 딱딱하게 손끝에서 만져질 때 아침엔 두통이 있고, 점심땐 비가 내리고 밤새 달무리 속을 걸아가 큰 눈을 가진 개처럼 너의 불 꺼진 창문을 지키던 나는 이제 없다 그때 너와 맞바꾼 하나님은 내 말구유 같은 집에는 다신 들르시질 않겠지 나는 어머니보다 더 빨리 늙어가고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안되는 행복한 흉내를 거울은 조용히 밀어낸다 혼자 베란다에 설 때가 많고, 너도 남편 몰래 담배나 배우고 있으면 좋겠다 냄새나는 가랑이를 벌리고 밑을 씻으며 습관적으로 욕을 팝콘처럼 씹어 먹고 아이의 숙제를 끙끙대며 어느 것이 정답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너무 많은 정답과 오답을 가진 ..

부치지 않은 편지2 / 정호승

그림 / 김진구 부치지 않은 편지2 / 정호승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람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 정호승 /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조퇴 / 강희정

그림 / 안려원 조퇴 / 강희정 드르륵 교실문 열리는 소리 슨상님 야가 아침만 되믄 밥상머리에서 빗질을 했산단 말이요 긴 머리카락 짜르라 해도 안 짜르고 구신이 밥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참말로 아침마다 뭔 짓인지 모르것어라 킥킥 입을 가리고 웃어 대는 책상들 아버지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낮술이 뺀질뺀질 빨갛게 웃고 있는 4교시 수업 시간 덩달아 붉어진 내 얼굴은 밖으로만 내달리고 싶어 아버님 살펴가세요 어서가세요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일찍 점심 먹고 운동장 나가 놀아라 나보다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선생님 달걀 프라이가 들국화처럼 피어 있는 생일 도시락이 아버지 손을 잡고 산들산들 집으로 걸어간다

부치지 않은 편지1 / 정호승

그림 / 성기혁 부치지 않은 편지1 / 정호승 ​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이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 이슬에 새벽 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 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정호승시집 / 새벽편지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그림 / 신종식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 1933년 동경 출생 *1955년 시 정적 (靜寂) 이 서정주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됨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 출간 *1970년 두 번째 시집 (햇빛 속에서) 출간 *1994년 한국 시인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