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1 29

나의 하나님 / 김춘수

그림 / 신종섭 ​ ​ ​ 나의 하나님 /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 시선 ​ ​ ​ ​

별무리 / 이재무

그림 / 성기혁 ​ ​ ​ ​ 별무리 / 이재무 별을 보고 혼자 말하네 짐을 벗으려 해도 그리움이 자꾸 실린다고 은하의 강가에 주저앉은 별무리 어린 우리를 두고 가신 어머니별이며 젖 먹으러 따라간 내 동생별이고, 못다 살고 떠난 누님별과 전쟁에 산화한 형님별이리 나를 키우느라 애간장 다 녹인 아버지별 옆에 반짝이는 저 별은 선생님별이다 꿈을 키워주신 선생님 팔베개 처음으로 느껴본 사랑의 체온 아직도 귀에 대고 속삭이신다 사랑하는 사람아 별이 되어라 늙었다 하지 말고 소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렴 정이 그립거든 내 품으로 달려오너라 선생님별은 아직도 밤새워 반짝이신다 비 오는 밤에도 훤히 보이는 저 허공의 별무리들. * 이재무시집 / 바람의 언어 ​ ​ ​ ​ ​

​나뭇가지 사이로 신음하던 / 이성복

그림 / 이정숙 ​ ​ ​ 나뭇가지 사이로 신음하던 / 이성복 ​ ​ 검은 바위들 끼고 흐르는 물 위로 겹친 나무 그림자 어둡고 거기, 나뭇가지 사이로 신음하던 해가 끙 하며 선지 덩어리 쏟아 붓는다 거기, 차갑고 맑은 물에 눈 어두운 쏘가리가 살아, 천렵 나온 사내들 통발을 들이민다 거기, 눈 어두워 비늘과 지느러미로 물길 헤아리는 쏘가리, 쏘가리만 아는 물속 지도 살 찢는 바람에도 웃통 헐헐 벗고 풍덩 찬물 속에 뛰어들어야 보이는 지도, 통발 아랑곳 않고 물살을 가르는 물고기 근육에 힘이 붙는다 ​ ​ ​ 이성복 시집 / 아, 입이 없는 것들 ​ ​ ​ ​

물 위에 쓴 시 / 정호승

그림 / 황 순 규 ​ ​ ​ 물 위에 쓴 시 / 정호승​ ​ ​내 천 개의 손 중 단 하나의 손만이 그대의 눈물을 닦아주다가 내 천 개의 눈 중 단 하나의 눈만이 그대를 위해 눈물을 흘리다가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하여 길이 없는 밤은 너무 깊어 달빛이 시퍼렇게 칼을 갈아 가지고 달려와 날카롭게 내 심장을 찔러 이제는 내 천 개의 손이 그대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내 천개의 눈이 그대를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 ​​ ​ 정호승 시선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 ​ ​

눈물이 시킨 일 / 나호열

그림 / 장주원 ​ ​ ​ 눈물이 시킨 일 / 나호열 ​ ​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 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꺼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 ​ ​ 나호열 시집 / 바람과 놀다 ​ ​ ​ ​ ​

봄비는 가슴에 내리고 / 목필균

그림 / 이영학 ​ ​ ​ ​ 봄비는 가슴에 내리고 / 목필균​ ​ ​ 그대가 보낸 편지로 겨우내 마른 가슴이 젖어든다 ​ 봉긋이 피어오른 꽃눈 속에 눈물이 스며들어, 아픈 사랑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겨울 일기장 덮으며 흥건하게 적신 목련나무 환하게 꽃등 켜라고 온종일 봄비가 내린다 ​ ​ ​ 詩 전문 ​ ​ ​

​번역자 / 장혜령

그림 / 조대현 ​ ​ ​ ​ 번역자 / 장혜령​ ​ ​ ​ 이 숲에는 먼 나무가 있다 흑송이 있고 물푸레나무가 있다 ​ 가시 사이로 새어드는 저녁 빛이 있고 그 빛에 잘 닦인 잎사귀가 있다 ​ 온종일 빛이 닿은 적 없는 내부에 단 한 순간 붉게 젖어드는 것이 슬픔처럼 가만히 스며드는 것이 있다 ​ 저녁의 빛은 숲 그늘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다 ​ 그 속에 새 그림자 하나 ​ 날개짓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 비릿한 풀냄새가 난다 불타버린 누군가의 혼처럼 ​ 이 시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이곳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 꿈속에서 물위에서 나를 적는 사람 ​ 흔들리면서 내게 자꾸 편지를 보내는 사람 ​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 ​ ​ ​ 장혜령 시집 ..

운주사 / 함민복

그림 / 신종식 ​ ​ 운주사 / 함민복​ ​ ​ 비 내려 와불의 눈에 빗물 고인다 내 아픔이 아닌 세상의 아픔에 젖을 수 있어 내리는 비도 눈물이구나 그렇게, 다 그렇게 되어 세상에 눈물의 강 흐르면 그 위를 마음 배들 구름처럼 평화롭게 떠갈 수 있다는 설법인가 북두칠성 낮게 끌어내린 뜻도 알 듯한 ​ ​ ​ 함민복 시집 / 꽃봇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