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1 29

소리를 꿰매는 법 / 이 효

그 림 / 송인관 ​ ​ ​ 소리를 꿰매는 법 / 이 효 ​ ​ 겨울바람이 쿨럭이면 트고 갈라진 입술을 비좁은 창문 틈에 대고서 달동네는 밤새 휘파람을 불었다 손수레에 쪽방을 끌고 가는 노파 고물상으로 가는 길, 바퀴 터지는 소리 사이로 지난겨울 맹장 터진 어린 손주의 비명이 걸어 나온다 어미는 어디로 갔는지 성냥갑 닮은 쪽방에 아이 하나 촛농처럼 식어간다 자원봉사자들 연탄 나르던 비탈진 골목길 재개발 소식에 이웃들 불꽃 꺼지듯 사라지고 반쯤 열린 대문 앞 빨간 고무대야 속에는 지난여름을 박제시킨 꽃들이 떠난 이웃의 말라버린 이름을 솎아낸다 이른 새벽에 파지 줍는 세월은 바늘귀에 침묵을 꿰어 기울어가는 생을 덧대는 일이다 조각보처럼 이어온 날짜들이 노파의 입가에 주름처럼 세 들어 산다 당고개역 잡화가게 ..

2023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림 / 후후 ​ ​ 버터 /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물의 언어 / 장혜령

그림 / 박정심 ​ ​ ​ 물의 언어 / 장혜령 ​ ​ 바람이 지난 후의 겨울 숲은 고요하다 ​ 수의를 입은 눈보라 ​ 물가에는 종료나무 어두운 잎사귀들 ​ 가지마다 죽음이 손금처럼 얽혀 있는 ​ 한 사랑이 지나간 다음의 세계처럼 ​ 이 고요 속에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 초록이 초록을 ​ 풍경이 색채를 ​ 간밤 온 비로 얼음이 물소리를 오래 앓고 ​ 빛 드는 쪽으로 엎드려 잠들어 있을 때 ​ 이른 아침 맑아진 이마를 짚어보고 떠나는 한 사람 ​ 종소리처럼 빛이 번져가고 ​ 본 적 없는 이를 사랑하듯이 ​ 깨어나 물은 흐르기 시작한다 ​ ​ ​ 장혜령 시집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 ​ ​​ ​

멜로 영화 / 이진우

그림 / 조규일 멜로 영화 / 이진우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 적도 없는 관..

목계장터 / 신경림

그림 / 이미화 ​ ​ ​ 목계장터 / 신경림 ​ ​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울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라 짠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 ​ *충북 충주 부근 남한강변 어디쯤 목계나루란 나루가 있고 거기에 "목계장터"란 시비가 있다고 들었다. 그 고장이 고향인 신경림 ..

뒷모습 / 정호승

그림 / 소순희 ​ ​ ​ 뒷모습 / 정호승 ​ ​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답다고 이제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졌으리라 뒤돌아보았으나 내 뒷모습은 이미 벽이 되어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높은 시멘트 담벼락 금이 가고 구멍이 나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제주 푸른 바닷가 돌담이나 예천 금당실마을 고샅길 돌담은 되지 못하고 개나 사람이나 오줌을 누고 가는 으슥한 골목길 담쟁이조차 자라다 죽은 낙서투성이 담벼락 폭우에 와르르 무너진다 순간 누군가 담벼락에 그려놓은 작은 새 한마리 포르르 날개를 펼치고 골목 끝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나는 내 뒷모습에 가끔 새가 날아왔다고 맑은 새똥을 누고 갈 때가 있었다고 내 뒷모습이 아름다울 때도 있었다고 ​ ​ ​ ​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 ​ ​​ ​ ​

​허공을 적시는 분홍 / 이현경

그림 / 한회숙 ​ ​ 허공을 적시는 분홍 / 이현경 ​ ​ 빈 가지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 꽃 피는 속도로 우리들의 눈을 끌어모으고 있다 ​ 허공을 적시는 분홍 꽃잎이 수면에 접사되어 호수 둘레에 웃음이 떠 있다 ​ 벚꽃 무리를 어루만지는 바람의 손 ​ 화심이 머문 곳에 갓 나온 향기가 나비를 두근거리게 한다 ​ 바람을 열고 수만 개의 이야기로 부푸는 벚꽃을 무수히 읽고 있으면 ​ 저 공중에 어린 체온이 두근두근 마음을 휘감는다 ​ ​ ​이현경 시집 / 맑게 피어난 사색 ​ ​ ​ ​ ​ ​

파리의 네루다를 뒤덮는 백설 송가

그림 / 박삼덕 ​ ​ ​ 파리의 네루다를 뒤덮는 백설 송가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 中에서) ​ ​ 은은하게 걷는 부드러운 동반자, 하늘의 풍요로운 우유, 티 하나 없는 우리 학교 앞치마, 호주머니에 사진 한 장 구겨 넣고 이 여관 저 여관 헤매는 말 없는 여행자의 침대 시트. 하늘거리는 귀공녀들, 수천 마리 비둘기 날개, 미지의 이별을 머금은 손수건. 나의 창백한 미인이여, 파리의 네루다 님에게 푸근하게 내려다오. 네 하얀, 제독의 옷으로 그를 치장해 다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를 사무쳐 그리는 이 항구까지 네 사뿐한 순양함에 태워 모셔와 다오. ​ ​ ​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中에서)

그림 / 서명덕 ​ ​ ​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中에서) ​ ​ '벌거벗은' 당신은 그대 손만큼이나 단아합니다. 보드랍고 대지 같고 자그마하고 동그랗고 투명하고 당신은 초승달이요 사과나무 길입니다. '벌거벗은' 당신은 밀 이삭처럼 가냘픕니다. '벌거벗은' 당신은 쿠바의 저녁처럼 푸릅니다. 당신 머리결에는 메꽃과 별이 빛납니다. '벌거벗은' 당신은 거대하고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여름날의 황금 성전처럼.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