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1 29

2023강원일보 신춘문예

그림 / 강선아 귤이 웃는다 / 백숙현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담배를 돌렸다 담배에서 녹차 맛이 났다 가볍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연기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다 외투를 벗었다 양말을 벗었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친구들이 킥킥대며 웃어댔다 그들을 향해 탁자에 있던 귤을 던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머리에 명중하자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벽이 눈물을 흘렸다 깨진 귤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창문은 창문 탁자는 탁자 술잔은 술잔 귤은 귤 그러므로 나는 나 브래지어를 벗어 던졌다 도마와 밥솥을 집어 던졌다 저울과 모래시계와 금이 간 거울 때 묻은 경전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던졌다 담배 한 개비 다 타들어 가도록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가브리엘 가르세아 마르케스의 소설 심..

신창 시장, 긴 편지 / 이 효

그림 / 임천 신창 시장, 긴 편지 / 이 효 할멈을 끌고 간다 언제 어디서나 부르면 굴러온 작은 바퀴 이젠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이 없다 오늘은 할망구 생일 밥상에 덜렁 혼자 앉으니 지난 세월 허두 미안혀 울컥 생목 오른다 석탄 같이 타들어간 당신 먼저 하늘로 보낸 것 같아 신창 시장 달달달 돌며 매일 용서를 구한다 천천히 가유 영감 귓전에 들리는 할멈 목소리 화들짝 놀라 뒤돌아 보니 늙은 아이 홀로 긴 편지 끌고 간다 시집 / 도봉열전 (도봉 문화원) *우리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다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림 / 장소영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책을 끓이다 / 장현숙 ​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

벽속의 어둠 / 이 효

그림 / 이경수 벽속의 어둠 / 이 효 흔들리는 나뭇잎이라도 잡고 싶습니다 나뭇잎도 작은 입김에 흔들리는데 아! 하나님 당신의 숨 한 번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하얀 침대 위 어머니 얼음이 되어간다. 태어나서 스스로 가장 무능하게 느껴진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초라함에 울음도 표정을 잃어버린다. 눈물마저 원망스러운데 창문 넘어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 가지 끝 미세한 흔들림이 눈동자를 찌른다. 아니 그 떨림을 잡고 싶었다. 간절한 기도가 눈발로 날린다. 당신의 숨 한 번 불어주시길~~ 오! 나의 어머니

눈부신 햇살 / 나호열

그림 / 박삼덕 눈부신 햇살 / 나호열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하다 눈뜨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가며 꽃송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가슴에 담는 일이 행복이다 가슴에 담긴 것들 모두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마음 아팠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 행복이다 나호열 시집 / 바람과 놀다

가난한 아버지들의 동화 / 최금진

그림 / 강선아 가난한 아버지들의 동화 / 최금진 가난한 아버지는 가난한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학교 가는 아들 앞에 초라하지만 정성스럽게 상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가난이 싫었습니다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먹어! 어서 먹어! 안 먹어? 아버지는 가난한 자신이 부끄러워 화를 냈습니다 자신 앞에 누워있는 어리고 착한 가난의 뺨을 힘껏 때렸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난의 배를 발로 걷어찼습니다 먹어! 어서 처먹어! 그 아들도 커서 똑같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이제 그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직장도 없는 그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툭하면 술 먹고 손버룻 나쁜 남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뚝! 그쳐! 안 그쳐! 이런 식으로 울음을 달래는 가난한 가장을 아무도 아무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최금진 시집 / 새들의 역사

지친 그대여 / 안재식

그림 / 최원우 지친 그대여 / 안재식 노을마저 숨어버린 북악산에 그래도 아우성치는 풀꽃을 보시라, 둘러보면 서럽지 않은 사랑 어디 있으랴 억울하지 않은 이 뉘 있으랴 삶이란, 왕복표 없는 단 한 번뿐인 낯선 길 설레는 여행이기에 세상은 살 만한 것이거늘 칠흑의 정원에서도 꽃눈 틔우려 아우성치는 저, 성스러운 소리 그 끈기를 들어보시라 *한국문인협회 편집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동인 *중랑문학대학 출강

우주의 그릇 / 이근배

그림 / 심재관 우주의 그릇 / 이근배 하늘이 이보다 높으랴 바다가 이보다 넓으랴 조선 백자 항아리 흰 옷의 백성들 희고 깨끗한 마음 담아 우주의 그릇을 지었구나 어느 천상의 궁궐이 어느 심해의 용궁이 이렇듯 웅대장엄하랴 꺼지지 않는 백의의 혼불이 해와 달보다 더 밝구나 오랜 이 땅의 역사 여기 불멸의 탑으로 서 있나니 우주 안에 또 하나의 우주이어라 2023년 1월 신문예 초대시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역임 *경향, 서울, 조선, 동아, 한국일보 신춘문예 5관왕 *시집 외 전지연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