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푸른 언덕 2023. 1. 6. 17:52

 

그림 / 장소영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책을 끓이다 / 장현숙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건 그 자리에서 눈의 불을 켜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일기장이 제일 뜨겁다 그 안에는 태양이 졸아들고 별이 달그락거리면서 끓기 때문이다

 

책을 끓여 식힌 감상을 하룻밤 담가 놓았다가

 

여운이 우러나면 고운 체로 걸러내야 한다

 

그 한술 떠 삼키면

 

마음의 시장기가사라진다

 

 

 

 

<심사평 요약>

'책을 끓이다'는 현실 속의 사물인 '책'과 그에 수반하는 작자의 상상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시어 운용의 능숙한 솜씨가 사물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능력을 배가하고 있는 점이 크게 돋보였다. 시적 화자의 스탠스가 분명하여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장점에 속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에 합의했다.

 

 

*심사위원 : 김병택(시인, 문학평론가), 양영길(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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