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11 23

메기 / 신동호

그림 / 장현우 메기 / 신동호 파로호의 메기는 물안개를 먹고산다 안개는 추문을 감추지만, 흐릿하게, 아주 잊히지 않을 만큼만, 아는 사람들만 알 정도로만 사랑을 드러낸다. 깊은 자맥질. 강을 흘린 메기의 흔적만 쫓을 뿐, 미끄덩, 손에서 빠져나간 기억들을 주워담기에 우리들 마음이 너무 가난하다. 주낙을 기다리고 물안개를 기다렸다. 강물이 안개와 뒤섞여 낡은 거룻배의 바닥에서 찰랑댈 때 저녁의 메기들이 옛일을 떠올렸다. 안개를 좋아했던 작은 형의 두툼한 손이 지금도 뒤춤을 잡곤 한다. 파라호에서는 메기가 우리를 선택했다. 번번이 빈 주낙 때문에 낙담할 것 없다. 신동호 시집 /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

자화상 / 서정주

그림 / 박송연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

단풍나무 / 안도현

그림 / 김연화 단풍나무 / 안도현 둘러봐도, 팔장 끼고 세상은 끄떡없는데 나 혼자 왜 이렇게 이마가 뜨거워지는가 나는 왜 안절부절 못하고 서서 마치 몸살 끝에 돋는 寒氣처럼 서서 어쩌자고 빨갛게 달아오르는가 너 앞에서, 나는 타오르고 싶은가 너를 닮고 싶다고 고백하다가 확, 불이 붙어 불기동이 되고 싶은가 가을날 후미진 골짜기마다 살 타는 냄새 맑게 풀어놓고 서러운 뼈만 남고 싶은가 너 앞에서는 왜 순정파가 되지 못하여 안달복달인가 나는 왜 세상에 갇혀 자책의 눈물 뒤집어쓰고 있는가 너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왜 네가 되고 싶은가 그리운 여우 / 안도현 시집